귀한 공연은 감동을 너머 영감을 줍니다. 이 깊은 울림을 어떤 말로 새겨둘 수 있을까요.

2025년 11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내한 공연'최고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1. 정교함이 빚어낸 마법의 순간

오늘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모음곡>(이하 만다린)이었습니다. 예습하면서 페트렌코와 베를린필의 조합이라면 역대급 연주가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다린은 미세한 타이밍,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정교한 다이내믹 대비가 개별 악기부터 파트 간 앙상블에 이르는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게 제어되어야 하는 곡입니다. 이 다층적인 정교함이 없다면 그저 혼란스러운 소음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이 지점에서 페트렌코 특유의 집요하리만큼 마이크로한 접근이 빛을 발했습니다. 자칫 소음으로 들릴 수 있는 곡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디테일을 살려내면서도, 오케스트라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엄청난 텐션. 얀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BRSO) 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경험이었습니다.

연주를 듣는 내내 소리가 장면이 되어 눈앞에 그려지고, 몸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청각이 시각과 촉각으로 전이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솔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눈앞에 발레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촉각적 경험이었습니다.

2. 긴밀한 앙상블, 층층이 쌓인 색채

첫 곡 야나체크의 <라치안 춤곡>에서부터 느낌이 왔습니다. 현악 파트의 보잉은 세계 일류 악단에게서도 컨디션이 최상일 때만 볼 수 있는 드문 풍경이었습니다.

8년 전 래틀이 지휘하던 베를린 필은 공부만 잘하고 감정은 메마른 모범생 같았다면, 오늘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은 감정과 표현력이 살아 숨 쉬는 '영혼이 깃든 모범생' 같았습니다.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습니다. 2년 전 내한에서도 느꼈지만(인스타그램 후기), 이번 내한은 더 원숙해졌습니다.

페트렌코의 정교함이 <만다린>에서는 텐션으로 빛을 발했다면, <페트루슈카>에서는 황홀한 색채감을 빚어냈습니다. 특히 초반 사육제 장면의 다채로운 음색은 정교한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8년 전 내한 때도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졸았던 기억밖에 없네요🤣)

올해 플루트 수석으로 베를린필에 새로이 합류한 스테판 라그나르 회스쿨드손(Stefán Ragnar Höskuldsson)의 솔로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노래하는 듯한 따스한 서정이랄까요. 8년 전 같은 곡을 연주했던 파위(Pahud)의 파워풀했던 소리와는 또 다른 결의 감동이었습니다.

3. 감동을 넘어, 삶의 영감으로

좋은 공연은 감동을 넘어 영감을 줍니다. '최고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키릴 페트렌코의 음악에 대한 집요한 헌신. 2년 전 내한 때도 느꼈지만, 온몸으로 지휘하는 페트렌코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예술이었습니다.

또한 오케스트라 자체가 하나의 악기가 된 듯한 정교한 조화. 모든 파트가 훌륭했지만 목관 파트, 특히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조너선 켈리(Jonathan Kelly)의 오보에, 회스쿨드손(Höskuldsson)의 플루트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너무나 쉽게 연주해내는 모습에서 대가의 남다름을 느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이런 양질의 것들을, 최고 수준의 것들을 더 많이 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이렇게 접하는 순간들이야말로 제가 지향해야 할 기준점과 기대치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삶의 큰 기쁨 중 하나는 마음 줄 곳을 찾고, 그것에 탁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도파민보다는 천천히 숙달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은은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언제나 영감을 줍니다. (최근에는 오타니와 야마모토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죠.)

감동을 넘어, 삶의 의미와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은 영감을 준 공연이었습니다. 이 울림을 '담은 순간들'에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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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주는 울림 - 베를린 필하모닉 & 키릴 페트렌코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 공연은 '최고 수준의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감동을 넘어, '양질의 것들'을 통해 삶의 기준점을 세우고 '숙달되는 기쁨'을 추구해야겠다는 영감을 얻은 순간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