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름다운 · But Beautiful
2026. 10. 31
김유자 개인전 《쇼팽공항》, 김세중미술관
Kim Yuja, Chopin Airport, Kimsechoong Museum, Seoul
Leica M10 Monochrom · Nokton 50mm f/1.5
마음 줄 곳을 찾아 방황하던 시절,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나누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좋아서 간직한 것들을 나누며 아직 서툰 제 모습도 있는 그대로 남겨보려 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마음 둘 곳을 찾을 때 이 이야기들이 곁에 있기를 바라면서요.
2026. 10. 31
김유자 개인전 《쇼팽공항》, 김세중미술관
Kim Yuja, Chopin Airport, Kimsechoong Museum, Seoul
Leica M10 Monochrom · Nokton 50mm f/1.5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의 개인전에 다녀왔습니다. 전시 제목은 ‘되돌리지 않는 수리’였는데, 이 제목이 참 좋았어요.
무언가를 고친다고 하면 대개 고장 나기 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 망가졌는지 모르겠네”라는 말은 잘 고쳤다는 칭찬이 되죠. 그런데 이 전시의 제목은 되돌리지 않는데도 수리라고 말합니다.
아티아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교외와 알제리에서 자랐고, 상처와 수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온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캔버스를 절개한 뒤 손으로 다시 꿰맨 작업이 있습니다. 바느질 자국은 감춰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요. 절개하기 전의 천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갈라졌던 자리는 이어져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다가 사람의 상처에도 마음이 갔습니다. 이미 겪은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회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되돌릴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 전시 제목에서 그런 가능성을 느꼈어요.
어떤 기억에 다시 마음이 흔들릴 때 “왜 나는 아직도 이럴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아져야 잘 회복한 것 같고, 다시 아프면 그동안의 노력이 소용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기억이 내 삶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일 거예요. 그사이에 마음을 쏟게 된 것이 생기고, 같은 일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여전히 아픈 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애써 살아온 시간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과 그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여전히 원망스럽고,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런 마음까지 다 정리해야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저는 또다시 지금과는 다른 제가 되기를 기다려야 할 겁니다. 수리의 출발점이 지금의 나여도 된다면, 거기에는 아직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함께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상처를 겪은 뒤에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들과 소중한 시간이 생겨도, 그 일을 겪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의 삶을 아끼기 위해 과거의 상처까지 좋은 일로 바꾸지는 않아도 되는 거예요. 지나온 일을 좋은 이야기로 고쳐 쓰지 않은 채로도,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위로가 됐습니다.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Mirrors and Masks》 연작이었어요. 아프리카 전통 가면을 본떠 만든 나무 얼굴에 거울 조각을 붙인 작업이에요. 패인 듯한 나무 표면에서는 지나온 시간이 떠오르고, 거울에는 지금 주변의 풍경이 비칩니다. 나무의 모습은 남아 있으면서도 거울에 들어오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얼굴이었어요.

정체성이라는 제 오랜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 내가 겪은 일과 만난 사람들, 지금까지 해온 선택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저 거울에는 아직 비치지 않은 풍경들이 있잖아요. 앞으로 어떤 빛이 들어오고 누가 그 앞에 설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환경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나를 설명할 때도 그런 자리가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지나온 이력과 함께, 지금 무엇에 반응하고 앞으로 무엇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지도요.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이미 남아 있는 것들에만 너무 매여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어요.
이 얼굴에서 수리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로 보였습니다. 지나온 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겪은 존재가 이후의 시간을 계속 만들어간다는 것. 나무와 거울이 함께 있는 이 얼굴이 그래서 좋았습니다.
거울이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게 했다면, 캔버스의 봉합은 지나온 시간을 다시 보게 합니다. 꿰맨 자국에는 천이 잘렸다는 흔적과 함께 그곳에 손을 대어 이어 붙인 흔적도 남아 있어요. 얼마나 말끔하게 고쳐졌는가에 앞서, 그곳을 돌본 일이 있었다는 것이 보여요.
아픈 시간을 돌아볼 때도 얼마나 아팠는지뿐만 아니라, 아픈 나를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나 나아졌고 무엇을 해냈는지만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무엇을 감당하고 있었는지까지 살피면, 아무것도 못 했다고 여긴 하루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쓴 시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상처를 준 일에 감사하지 않아도, 그 이후 자신을 돌보려 했던 노력은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 그동안 저와는 거리가 있던 ‘돌봄’이라는 말로 제 시간을 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전에 읽은 『아픈 몸을 살다』가 떠올랐습니다.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 마음을 두고, 계속 회복 중이면서도 원하는 삶을 지금 붙잡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좋았어요. 돌봄이 필요한 지금도 제 삶의 본편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책에는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보던 밤, 통증이 덜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몸 밖의 세계와 연결되었던 경험. 저는 아름다움에 마음이 가 있는 동안 아픔이 차지하는 자리가 달라진 것으로 읽었어요.
제가 끊임없이 무언가에 마음을 주려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프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음악감상과 전시, 독서와 산책으로 관심이 넓어졌어요. 마음 줄 곳을 통해 아픔을 잠시 잊기도 하고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마음 줄 곳을 찾거나 아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얻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잘 쉬고, 감정을 잘 이해하고, 그만큼 나아졌다는 결과까지 내야 한다면 돌봄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요. 쉬었는데도 여전히 힘들 수 있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쉼이 소용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음악을 듣고 전시를 찾아다니던 시간을 돌봄이라는 말로 다시 봅니다. 그때 좋아했던 것들과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그대로인데, 아픈 저를 위해 애쓰던 모습도 함께 보여요. 돌봄. 저에겐 머나먼 단어였는데, 그 말로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제 삶에 이미 있었습니다.
전시 하나를 만난 후, 지나온 시간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만날 것들도 이렇게 저를 만들어가겠지요. ‘되돌리지 않는 수리’라는 제목을 곁에 두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함께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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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 읽기 #2
David Gibson의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헤매는 일부터 몰입과 사진 버리기까지, 책에서 만난 여러 화두를 두루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그중 우연과 통제에 조금 더 머물러보려 합니다.
깁슨은 거리사진을 ‘계산된 우연(controlled luck)’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정할 수 없지만, 어디에 서서 무엇을 프레임에 넣고 언제 셔터를 누를지는 사진가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통제할 수 있는 데까지 통제한 뒤, 나머지를 우연에 맡긴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마친 뒤에도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찍고 싶은 사진이 있을 테니까요.
비가 내리는 런던 거리에서 깁슨은 구름 모양의 얼룩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그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빨간 장화를 신고 빨간 우산을 든 소녀가 구름 아래를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진에 담긴 것은 수수한 옷차림의 남자였습니다. 남자의 키도 깁슨이 바라던 것과 달랐습니다. 남자는 구름 아래로 깔끔하게 지나가지 않고, 구름과 겹쳐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겹침 때문에 벽의 얼룩이 우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이게 됩니다.

깁슨은 여전히 색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쉬움이 사라진 사진은 아니었던 셈이죠. 다만 다른 불완전함들은 사진 안에서 제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 상상했던 장면에는 없던 재미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상상한 좋은 사진과 다른 방식으로 좋은 사진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 저는 이 태도가 무척 좋았습니다.
스톡홀름에서도 깁슨은 구름처럼 보이는 벽을 발견합니다. 이번에는 회벽이 벗겨진 자국이 여러 개였고, 배경도 복잡했습니다. 구름과 지나가는 사람을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어울리게 담기가 더 어려웠던 셈입니다. 그는 가로와 세로로 구도를 바꿔가며 오래 찍었지만, 결과를 돌아보며 너무 애쓴 사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골라낸 사진도 어느 정도는 괜찮았으나, 런던 사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런던에서는 바라던 모습과 다른 남자가 지나갔고, 구름과 우산의 뜻밖의 겹침이 사진을 살렸습니다. 스톡홀름에서는 구름과 사람이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만큼 사진이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례를 보며 원하는 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놓치는 것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한 모습에 꼭 맞는 것만 찾다 보면, 눈앞에 다른 좋은 장면이 생겨도 지나칠 수 있을 테니까요. 빨간 우산의 소녀만 찾고 있었다면, 우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목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제가 오래 좋아해온 대사와 이어집니다.
“파도가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어.”
2022년, 클래식과 조금 거리를 두고 싶다는 글을 쓰면서 이런 질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영역이 너무 좁은 건 아닐까?”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고는 싶지만, 클래식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클래식 밖에서도 그만큼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파도가 내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곳으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제가 이미 아는 아름다움은 소중합니다. 오래 좋아했기 때문에 길러진 감각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감각이 앞으로 만날 아름다움의 범위까지 정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재즈에도 그래서 마음이 갑니다. 함께 연주할 곡을 정해두어도, 그 안에서 다른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들려줄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연주로 응답하면서 음악은 이어집니다. 혼자 구상할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음악이 함께 연주하는 동안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좋습니다.
깁슨의 사진을 보며 그 태도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찍고 싶은 장면을 상상하며 준비하되, 막상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다르다면 거기에 맞춰 다시 선택하는 것. 준비해온 만큼 잘 찍고 싶지만, 준비하며 생각하지 못한 것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긴다는 말에도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어디로든 흘러가면 좋다고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살펴보는 일 말입니다.
재즈를 생각하다 보면 사람 사이의 대화도 떠오릅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 안에서 생겨나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준비한 이야기와 상대가 준비한 이야기가 만나,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대화가 흘러갈 수도 있겠죠.
깊이 교감하고 싶다는 바람은 소중합니다. 다만 그 교감이 꼭 같은 취향이나 제가 상상한 분위기에서만 생길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반가울 수도 있고, 제게는 낯선 것을 상대가 왜 좋아하는지 듣다가 가까워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서로에게 무엇을 건넬 수 있는지는 주고받는 동안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제가 기대한 말을 하는지에만 마음을 쓰면, 예상 밖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하려던 말을 잠시 미뤄두고 듣다 보면, 처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궁금해지기도 하겠지요.
제가 바라는 교감의 모습이 있어도, 실제 대화가 그 모습에서 벗어날 여지는 남겨두고 싶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요.
책 속에서 깁슨은 원하던 소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찍은 남자의 사진에는 소녀를 상상할 때는 없었던 좋음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생각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 때는, 제가 기다리던 장면이 오지 않은 자리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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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두에냐스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연주자였어요. 기교와 표현력이 훌륭하다고 느끼면서도 해석은 어딘가 낯설었습니다. 공연을 보며 남긴 메모에는 이런 말이 있었어요. “모르는 곡 들으면 더 좋을 것 같아.”
지인에게 두에냐스의 해석이 조금 과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지인은 그동안 제가 많이 들어온 연주들의 영향일 수 있다고 했어요. 제가 익숙하게 들어온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최근 독서모임에서 읽은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하다』가 떠올랐습니다. 베이지안 사고방식을 다룬 책이었어요.
새로운 증거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사전 믿음(prior). 이 개념을 떠올리니 제 감상을 다시 살펴보게 됐습니다. 오래 들어온 연주들이 이번 음악을 듣기 전부터 어떤 기대를 만들고 있었을까요. 두에냐스의 해석이 어색했던 걸까요, 제게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있었던 걸까요.
취향을 가꾸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습니다. 그 덕분에 예전에는 지나쳤을 차이도 듣게 됐고, 좋아하는 연주도 생겼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연주들에 대한 익숙함이 다른 해석에 마음을 여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취향을 가꾸려다가 취향의 노예가 된 건 아닐까. 종종 하던 고민이 그날의 음악을 듣고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쌓아온 취향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오래 듣고 좋아한 연주들은 음악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게 해준 바탕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거기에는 음악을 들으며 받은 기쁨도 있어요. 어떤 해석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그 기쁨까지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를 넓히는 일이 지금까지의 나를 잘못으로 만드는 일일 필요는 없어요.
그날 두에냐스의 연주에 전적으로 공감이 갔던 건 아니에요. 다만 낯설게 느낀 이유를 조금 더 열어둘 수 있게 됐습니다. 익숙한 해석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과, 그 연주가 제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지 못했다는 경험은 함께 남을 수 있었어요.
그래도 경험의 범위는 넓혀보고 싶습니다. 오래 사랑한 연주들이 음악이 들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은 아닐 테니까요.
다양한 연주를 통해 여러 해석을 만나기. 나를 잠시 내려두고, 내가 좋아하던 방식과 다른 연주에도 시간을 내어 귀를 기울이기. 어떤 기대가 어긋났는지, 그 연주자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들려주려 했는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기. 그렇게 사전 믿음을 형성하는 경험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겠지요.
그 뒤에도 예전부터 좋아하던 연주를 더 좋아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여러 해석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이게 좋아’에는 처음과 다른 이해가 담겨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중에서도 제 마음이 더 움직이는 곳을 말하게 될 테니까요.
어느 날 전혀 다른 해석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겠지요. 좋아하는 것이 달라져도, 예전에 사랑했던 것이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때 받은 기쁨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까요.
책과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가 공연장까지 따라와, 음악을 듣는 제 모습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취향에 갇힌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다만 그동안의 취향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앞으로 무엇을 좋아하게 될지는 조금 더 열어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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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순간들 소개글에 취약함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2023년 봄 뮤지엄산에서 본 안도 다다오의 낙선작도 그런 기억 중 하나입니다.
당시의 글에는 전시에서 느낀 것과 함께, 일을 하느라 좋아하던 독서모임을 그만둔 아쉬움과 그 뒤에 만난 인연들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택한 길이 맞는지 고민하면서도 그 길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어가고 싶었던 마음까지요. 그날의 기록을 이곳에도 옮겨둡니다.
2023년 4월 29일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입니다.

1.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정신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는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 사무엘 울만
청춘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
어찌보면 진부할 수도 있는 메시지이지만,
뮤지엄산에서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열리고 있는 안도 다다오 기획전은
안도 다다오가 말하는 청춘의 메시지를
실로 아름답게 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안도가 공모전에 출품했다
낙선한 작품들도 전시가 되어 있다.
처음 볼 때는 왜 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오후 도슨트를 진행하신 박소은 대표님의 설명을 듣고서 가슴이 떨렸다.
"건축가가 어떻게 보면 어디 이력서 넣었다가
떨어진 거를 전시하는 거거든요.
그런 이유는 실패하는 것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거고
그런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같은 게
나의 마음이고 그게 청춘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청사과다"
자신의 어떤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깊은 울림을 준 윤혜정 국제갤러리 디렉터의 글이 떠오른다.
윤혜정 디렉터는 저서 <인생, 예술>에서
양혜규의 작품 창고 피스를 언급하며
'취약함을 드러내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양혜규는 전시장에라도 보관하고자 하는 마음에
폐기 처분 직전의 작품들을 포장상태 그대로 모아
팔레트 위에 쌓아두고 작품이라 명명한다.
자신의 어떤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그럼으로써 "당면한 현실을 예술적 경험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용기.
안도 다다오의 전시에 출품된 낙선작에서도,
양혜규의 작품에서도 이런 용기가 느껴졌다.
"‘용기 없음’은 불확실성과 위험, 실패의 취약함과 그 가능성이 깨끗이 제거된 '기형적인 용기'를 바라면서 생긴 부작용"이며,
"용기 courage의 어원은 ‘심장’이라는 뜻의 라틴어 cor,
즉 ‘내가 누구인지 진심을 다해 이야기한다’는 의미라고 하던데,
이것이 비단 예술가만을 위한 전언은 아닌 것"이라는
윤혜정 디렉터의 문장을 가슴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2.
뚜벅이에게는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던
뮤지엄산을 마침내 방문했다.
소중한 인연 덕분에.
5개월 전 스토리에 어떤 기록을 남겼다.
내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독서모임을
직장 업무 때문에 그만두게 된 상황,
비록 내 의지에 따른 선택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아쉬움이 없도록 만들기를
간절히 바랐나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별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었다.
업무상 만난 분들 모두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으셔서
가까워지게 됐다.
뮤지엄산에서 도슨트로 활동하는 분도 계셨는데
마침 뮤지엄산에는 안도 다다오의 기획전도 열리고 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뮤지엄산으로 향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뮤지엄산을 방문한 것도,
박소은 대표님의 도슨트를 들으면서 청춘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 것도
모두 별을 포기한 덕분이다.
"별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될테니까"라는
내가 무척 아끼는 문장을 가슴으로 느낀 날.
이로써 나는 집착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지게 됐다.
3.
공교롭게도 오늘은 입사 3년째되는 날이다.
2020년 4월 29일 입사 이후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겨운 날들도 많았는데,
입사 3주년을 사회생활을 하며
소중한 인연이 닿은 분들과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나는 애틋함이 많은 사람인지라
내가 행한 선택이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자주 한다.
언제까지 이 길을 걸을지는 모르겠지만,
걷는 동안은 내가 택한 길이
좋은 선택이 되도록 늘 애쓰고 싶다.
이 조직에서 경험해볼 수 있는 건 다 경험해보고 싶다.
이 경험들로 뿌린 씨앗들이
훗날 어떤 형태로든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믿는다.
내 길 앞에 펼쳐질 풍경들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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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에는 작품이 참 많습니다. 하나하나 다 보려고 하면 지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페어에서 한 작품이라도 내 것이 되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시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 떠올리고,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 작품 하나요. 이번 프리즈에서는 오랫동안 동경해온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런 작품을 만났습니다.
첫날, 오랫동안 동경해온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 부스부터 찾아갔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어요. 한참을 바라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세심하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작품을 보는 그 모습을 담았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보리스가 옆에 있던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대단하지 않느냐고, 정말 굉장한 작품이라고요. 세계적인 갤러리스트와 같은 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페어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보리스가 말한 작품은 중국 작가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보리스가 그렇게 바라보는 작품이라면 제가 아직 못 보고 있는 무언가가 있겠지 싶었어요. 어떤 점이 그토록 오랫동안 보리스의 시선을 가져갔는지, 그 시선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고요.
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가장 먼저 악셀 베르보르트 부스로 찾아가 같은 작품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마침내 그 그림이 제게도 들어왔습니다.

일상적인 물체 하나가 특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캔버스의 모든 요소가 그 하나를 빛나게 하려고 놓여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보다 보니 반대 같기도 했습니다. 그 물체 하나 때문에 주변의 공간까지 달라 보이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환경이 물체를 아름답게 하는지, 물체가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물체와 주변 공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오래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우환의 관계항이 떠올랐습니다. 돌과 철판을 보면서도 그 사이의 거리와 주변 공간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작업들. 이우환의 저서 『여백의 예술』에도 여백을 설명하는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큰 북을 치면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데, 이우환은 북을 포함해 그 울림이 미치는 공간을 여백이라고 말합니다. 북과 떨어져 있는 자리에도 울림은 닿습니다. 지금 그 그림을 다시 생각하면서도, 돌 하나와 그 주위의 넓은 공간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스지잉을 찾아보다가, 2025년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All Things in Kinship》의 서문을 보게 됐습니다. 비평가 Shen Qilan이 쓴 글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돌과 돌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중력이다.
서문은 돌에서 거울 속 반영으로 옮겨가는 관람자의 눈길을 따라갑니다. 무게와 색은 서로를 불러내고, 선과 형태는 시선을 이끌어 사물들 사이에 리듬을 만듭니다. 비평가는 사물들이 맺는 보이지 않는 관계와 친밀함을 중력에 빗대고 있습니다.
중력이라는 말이 좋았습니다.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도 무언가가 있다는 것. 제가 본 그림에서도 돌 하나는 거울 속 반영과, 또 주변 공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어요. 비어 있는 공간이 그저 빈 곳은 아니었어요.
빈 곳은 꼭 채워야만 충만해지는 걸까요. 여백에 다른 사물을 더 그려 넣지 않아도 시선은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걸 작품은 보여줬어요.
서문에 나온 공영(空盈), ‘충만한 비어 있음’이라는 말을 그런 감각으로 이해해봅니다. 비어 있는 공간에도 관계는 있을 수 있다는 것.
서문에 인용된 작가의 말도 마음에 남았습니다.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
외로운 파도 하나도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
매년 이맘때면 우울이 찾아오곤 해요.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마음과 그림을 연결해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래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는데, 인용된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위로받는 기분이었어요. 나도 혼자가 아니구나.
돌은 홀로 있는 모습 그대로도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홀로 있음과 관계 맺음이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움.
그렇게 생각하니 고독도 참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체의 존재감과 주변 공간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갔는데, 이제는 그 안의 고독까지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알아갈수록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보리스가 작품 앞에 오래 서 있던 모습도 다시 떠오릅니다. 그 시선이 궁금해서 저는 같은 그림을 며칠 동안 다시 찾아갔고, 집에 와서는 작가를 찾아보고 전시 서문을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오랜 화두들을 만났고, 요즘의 마음도 조금 들여다보게 됐어요.
사람과 작품 사이에도 중력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동경하던 보리스의 감탄에서 시작된 관심이 저를 그 그림 앞으로 거듭 데려다 놓았으니까요. 처음에는 제게 들어오지 않았던 작품이, 전시장을 떠난 지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을 건네고 있습니다.
지금 그 그림을 떠올리면 돌 곁의 넓은 공간도 함께 생각납니다. 그 안에 홀로 있는 모습까지 아름답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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