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장면 너머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 읽기 #2)

빨간 우산의 소녀를 기다렸지만, 사진에 남은 것은 수수한 옷차림의 남자였습니다. 상상했던 것과 다른 좋음을 알아보는 일. 깁슨의 거리사진에서 시작해, 재즈와 대화 속에서 주고받는 동안 생기는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David Gibson의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헤매는 일부터 몰입과 사진 버리기까지, 책에서 만난 여러 화두를 두루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그중 우연과 통제에 조금 더 머물러보려 합니다.

깁슨은 거리사진을 ‘계산된 우연(controlled luck)’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정할 수 없지만, 어디에 서서 무엇을 프레임에 넣고 언제 셔터를 누를지는 사진가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통제할 수 있는 데까지 통제한 뒤, 나머지를 우연에 맡긴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마친 뒤에도 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찍고 싶은 사진이 있을 테니까요.


빨간 우산의 소녀는 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런던 거리에서 깁슨은 구름 모양의 얼룩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그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빨간 장화를 신고 빨간 우산을 든 소녀가 구름 아래를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진에 담긴 것은 수수한 옷차림의 남자였습니다. 남자의 키도 깁슨이 바라던 것과 달랐습니다. 남자는 구름 아래로 깔끔하게 지나가지 않고, 구름과 겹쳐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겹침 때문에 벽의 얼룩이 우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이게 됩니다.

런던 거리의 구름 모양 얼룩 앞을 우산 쓴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진들. 남자의 우산과 얼룩이 겹쳐 연기처럼 보인다.
사진: David Gibson, London, 2008.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에서.

깁슨은 여전히 색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쉬움이 사라진 사진은 아니었던 셈이죠. 다만 다른 불완전함들은 사진 안에서 제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 상상했던 장면에는 없던 재미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상상한 좋은 사진과 다른 방식으로 좋은 사진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 저는 이 태도가 무척 좋았습니다.


스톡홀름에서도 깁슨은 구름처럼 보이는 벽을 발견합니다. 이번에는 회벽이 벗겨진 자국이 여러 개였고, 배경도 복잡했습니다. 구름과 지나가는 사람을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어울리게 담기가 더 어려웠던 셈입니다. 그는 가로와 세로로 구도를 바꿔가며 오래 찍었지만, 결과를 돌아보며 너무 애쓴 사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골라낸 사진도 어느 정도는 괜찮았으나, 런던 사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스톡홀름 거리에서 회벽이 벗겨져 구름처럼 보이는 담장 앞을 우산 쓴 행인과 자전거가 지나가는 연속 사진.
사진: David Gibson, Stockholm, 2012.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에서.

런던에서는 바라던 모습과 다른 남자가 지나갔고, 구름과 우산의 뜻밖의 겹침이 사진을 살렸습니다. 스톡홀름에서는 구름과 사람이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만큼 사진이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례를 보며 원하는 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놓치는 것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한 모습에 꼭 맞는 것만 찾다 보면, 눈앞에 다른 좋은 장면이 생겨도 지나칠 수 있을 테니까요. 빨간 우산의 소녀만 찾고 있었다면, 우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어디로 데려갈지

이 대목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제가 오래 좋아해온 대사와 이어집니다.

“파도가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어.”

2022년, 클래식과 조금 거리를 두고 싶다는 글을 쓰면서 이런 질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영역이 너무 좁은 건 아닐까?”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고는 싶지만, 클래식만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클래식 밖에서도 그만큼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파도가 내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곳으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제가 이미 아는 아름다움은 소중합니다. 오래 좋아했기 때문에 길러진 감각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감각이 앞으로 만날 아름다움의 범위까지 정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재즈에도 그래서 마음이 갑니다. 함께 연주할 곡을 정해두어도, 그 안에서 다른 연주자가 어떤 소리를 들려줄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연주로 응답하면서 음악은 이어집니다. 혼자 구상할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음악이 함께 연주하는 동안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좋습니다.

깁슨의 사진을 보며 그 태도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찍고 싶은 장면을 상상하며 준비하되, 막상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다르다면 거기에 맞춰 다시 선택하는 것. 준비해온 만큼 잘 찍고 싶지만, 준비하며 생각하지 못한 것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긴다는 말에도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어디로든 흘러가면 좋다고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살펴보는 일 말입니다.


주고받는 동안 생기는 것

재즈를 생각하다 보면 사람 사이의 대화도 떠오릅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 안에서 생겨나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준비한 이야기와 상대가 준비한 이야기가 만나,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대화가 흘러갈 수도 있겠죠.

깊이 교감하고 싶다는 바람은 소중합니다. 다만 그 교감이 꼭 같은 취향이나 제가 상상한 분위기에서만 생길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반가울 수도 있고, 제게는 낯선 것을 상대가 왜 좋아하는지 듣다가 가까워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서로에게 무엇을 건넬 수 있는지는 주고받는 동안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제가 기대한 말을 하는지에만 마음을 쓰면, 예상 밖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하려던 말을 잠시 미뤄두고 듣다 보면, 처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궁금해지기도 하겠지요.

제가 바라는 교감의 모습이 있어도, 실제 대화가 그 모습에서 벗어날 여지는 남겨두고 싶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요.

책 속에서 깁슨은 원하던 소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찍은 남자의 사진에는 소녀를 상상할 때는 없었던 좋음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생각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 때는, 제가 기다리던 장면이 오지 않은 자리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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