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의 관심과 태도 - 오래 바라본 시간이 남기는 것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 읽기 #1)
셔터를 언제 눌러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이 말한 것은 관점과 태도였어요. 헤매는 일, 우연을 알아볼 눈, 오래 바라본 시간이 남기는 것. 사진에 관한 책에서 제가 오래 품어온 화두들을 다시 만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라이카 아카데미 뒷풀이에서 추천받은 David Gibson의 『The Street Photographer's Manual』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순간 셔터를 눌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관점과 태도였습니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돌아다니며 우연을 받아들이는가를 다루고 있는데요, 사진가는 거리에 머물러 관찰하고, 우연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에 관한 책을 읽는데, 제가 오래 생각해온 화두들이 사진 안에 이미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글은 그 화두들을 스케치하듯 담아볼게요.
헤매는 사진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 보통 “오늘 뭘 찍지?”부터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출발점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나가서 돌아다니고,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
그렇다고 완전히 아무 계획 없이 헤매는 건 아닙니다. 책에서는 재즈 연주자를 이야기합니다. 연주자는 어디로 갈지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연주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미리 정해두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통제하면서도 우연과 그 순간의 감각에 열려 있습니다.
거리사진가도 비슷합니다. 사진을 찍겠다는 방향은 있지만, 어떤 장면을 만나게 될지는 모릅니다. 거리를 걷고 기다리며, 때로는 목적 없이 헤매다가 어느 순간 장면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곤 하죠. 저자는 이런 상태를 거리사진의 다른 이름으로 ‘길 잃은 사진’(lost photograph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헤매는 일이 방향을 잃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찍지 못한 채 돌아오는 날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실패라고만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어떤 장면 앞에서 걸음을 늦추는지, 무엇은 그냥 지나치는지를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우연을 위해 준비하다
좋은 사진은 우연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장면이 좋은 사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우연일 수는 없겠죠.
우연을 기다리면서도, 그 우연을 알아볼 눈은 준비해두는 것.
나를 상황 속에 두고, 나타난 장면을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준비해두는 일. 모든 것을 계획한다고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기다린다고 우연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통제와 우연 사이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 이 책에서 말하는 거리사진은 그런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장비보다 사진집
장면을 알아보는 눈은 장비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좋은 사진을 많이 보고, 여러 사진가의 작업을 접하고, 사진집을 곁에 두는 일. 저자는 사진집이 사진가에게 영감을 주는 가장 중요한 매체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인쇄된 페이지는 화면의 방해 없이 한 작업을 오래 바라보게 하고, 사진을 더 온전히 흡수하게 합니다.
책 속에는 “장비보다 책을 사라”는 조언도 나옵니다. 비싼 카메라를 하나 더 사는 것보다 사진집 몇 권을 오래 보는 일이 사진을 바라보는 범위를 더 넓혀줄 수 있다면서요.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
카메라를 들고 나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건물 사이로 떨어지는 빛의 각도, 나뭇잎에 드리운 그림자의 결, 콘크리트 벽의 거친 질감과 옷감의 주름, 사람들 얼굴 위의 명암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빛과 형태와 질감을 먼저 보게 됐고, 걷는 일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장면이 사진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부터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오래 보고 비교하고 다시 보는 과정에서 조금씩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그 장면 앞에서 멈추는지,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지, 다른 사람의 좋은 사진을 보고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내 기준을 세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기술로부터의 자유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방향으로 읽혔습니다. ISO·셔터속도·조리개를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촬영할 때 기술을 의식하느라 장면을 놓치지 않을 만큼 손에 익히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일을 하든 방법과 순서를 계속 생각합니다. 반복하다 보면 방법이 몸에 남고, 그때부터는 방법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채 눈앞의 장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저자는 카메라 설정에 정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편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카메라를 골라 기술을 뒤로 물리라고 말합니다. 기술을 익혀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사진에는 사진가가 담겨있다
사진은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지만, 결국 사진가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가의 관심과 태도는 사진 안에 남습니다.
그냥 눈에 들어온 장면을 찍어 올렸을 뿐인데, 사진을 본 지인이 사진에서 제가 느껴진다고 말하거나, 제가 평소 생각하던 화두들이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금 놀랐습니다. 찍는 순간에는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거든요.
사진은 카메라를 드는 순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소 무엇을 보고, 무엇에 마음을 두는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가꾸는 일도 사진의 일부였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일상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 분야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집착, 몰입, 숙성된 몰입
좋은 사진가들에게는 몇 년에 걸친 강렬한 집중의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한 가지에 깊이 들어가면 삶이 좁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만 보고, 그림자만 보고, 빛과 색과 프레임만 보는 시간. 다른 것들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시간.
그런데 한 가지를 오래 바라본 시간은 어느 순간 다른 것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좁아진 줄 알았던 삶이 다른 방향으로 넓어지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과거를 돌아봤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마음을 주면 깊이 빠지는 편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취약해졌고,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클래식과 거리를 두려 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은 운동으로 옮겨갔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클래식에 쏟았던 시간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감정과 구체적인 디테일은 조금 흐려졌지만,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는 방식과 좋은 것을 알아보는 감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버리려고 멀어졌던 시간이 다른 것을 알아보는 눈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집착과 몰입은 완전히 다른 에너지라기보다, 같은 에너지가 대상과 나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상이 나를 붙잡고 다른 가능성을 닫으면 집착이 됩니다. 내가 선택한 대상에 깊이 들어가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으면 몰입에 가까워집니다. 대상에서 멀어진 뒤에도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것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남는다면, 숙성된 몰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집착을 미화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나를 삼키는 몰입은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때 나를 좁게 만들었던 집중이 시간이 지나 다른 대상을 이해하는 힘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은 늘 함께 하고 싶어요.
사진 버리기
사진을 많이 찍는 것과 무엇을 남길지 고르는 일은 또 달랐습니다.
책에 소개된 조언은 꽤 과감합니다. 사진을 고르는 일에 99%의 시간을 쓰고, 후처리에는 1%의 시간만 쓰라고 합니다.
사진을 찍은 뒤 다시 보고 덜어내는 일.
이 사진은 다시 볼 가치가 있는가. 비슷한 장면 중 무엇이 가장 정확한가. 한 장을 더 남기는 것이 정말 필요한가. 내가 이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진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날의 기억 안에 있는가.
많이 남기는 것보다 무엇을 남길지 고르는 일이 더 어렵더라구요.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버리는 일은 그 안에 들어간 시간과 마음까지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찍은 모든 사진을 붙잡고 있으면 정작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깊이 들어가는 일과, 그중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를 놓는 일은 함께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바라보지 않으면 고를 수 없고, 고르지 않으면 하나의 관점으로 남지 않습니다.
사진이 건네는 선물
사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제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 더 얻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헤매는 일은 방향을 잃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연은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숙련은 기술을 과시하는 일이 아니라 기술을 생각하지 않을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한 가지에 깊이 들어간 시간은 삶을 좁히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을 알아보는 눈으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을 찍고 무엇을 남길지 고르는 일은, 내가 무엇에 계속 마음을 줄지 고르는 일과 닮아 있었습니다.
사진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서 제가 오래 품어온 화두들이 사진의 언어로 다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집착과 몰입, 숙련과 버리기, 헤맴과 우연.
그리고 더 많은 화두들이 사진 속에서 기다리고 있겠죠.
앞으로 차차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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