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기준을 고수하는 일
'안 됩니다'라는 말을 현실의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애플 인 차이나』를 읽으며 높은 기준은 고집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킬 것과 바꿀 것을 나누는 일, 그리고 그 기준의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지까지 생각해봅니다.
스티브 잡스에게 붙은 ‘현실 왜곡장’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안 됩니다”라고 말해도 그 말을 현실의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제품을 실제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이었어요.
『애플 인 차이나』에는 팀 쿡이 공급업체와 협상하는 동료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나옵니다.
Be aggressive and unreasonable.
협상하기도 전에 공급업체가 받아들일 만한 선을 짐작하지 말고, 애플이 원하는 것을 먼저 모두 요구하라는 것이었어요. 불가능하다면 공급업체가 답할 테니까요.
현실과 부딪히기도 전에 스스로 기준을 낮추지 말라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어요.
하지만 책을 읽으며 높은 기준을 고수하는 일과 처음 떠올린 방법을 고집하는 일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높은 기준과 고집이 갈리는 곳
팀 쿡의 말만 보면 높은 기준은 무리한 요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책 5장에 나오는 iMac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한 초기 iMac을 본 제품설계 엔지니어들은 만들 수 없는 제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애플이 안 된다는 말을 다루는 방식은 훗날 이런 표현으로 남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차를 절벽에서 몰아봐야 한다.
충분한 실험과 자료 없이 한계를 단정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초기 iMac에서도 담당자를 바꾸고 몇 달 동안 다른 방법을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투입된 엔지니어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초기 iMac의 도면에는 실제로 만들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잡스는 NeXT 시절부터 함께 일하며 신뢰해온 기계설계 회사 Acorn에 도면을 보냈습니다. Acorn도 손잡이를 지지할 구조가 없다는 점을 비롯해 같은 문제들을 발견했어요. 초기 도면대로는 제대로 된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렵다고 말했던 엔지니어들이 옳았던 겁니다.
Acorn의 판단을 받아들인 뒤, 애플은 처음 구상에서 꼭 지켜야 할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나눴습니다.
iMac을 iMac답게 만드는 큰 아이디어는 지켰어요. 대신 실제로 제조를 막던 부분을 고쳤습니다. 금형에서 빠지지 않던 가로 줄무늬를 세로로 바꾸고, 로직보드가 들어갈 공간을 넓혔습니다.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던 파란 케이스는 흐릿하게 보이도록 바꿨고, 겉으로 보이지 않게 나사와 고정장치를 넣어 손잡이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디자인팀 관계자는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있었지만 큰 아이디어는 타협하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저자는 이 장을 잡스가 의지만으로 물리법칙을 꺾은 이야기로 그리지 않습니다. 애플이 한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의심하고 → 한계까지 밀어붙여 검증하고 → 진짜 한계가 확인되면 수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기준을 고수한다는 건 모든 것을 그대로 고집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핵심을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바꿀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실패 뒤에 달라진 것
이 경험은 이후 애플의 일하는 방식에도 남았습니다. 아이브와 디자인팀은 생산과정에 더 깊이 들어가 소재와 금형, 엔지니어링을 배웠어요. 디자인과 제조는 계속 대화했고, 제조 현장에서 찾은 새로운 방법은 다음 디자인에 다시 반영됐습니다.
이러한 협업은 공급업체 공장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애플은 필요한 장비를 사서 공장에 들여놓고, 엔지니어들을 몇 주에서 몇 달씩 현장에 보냈어요. Foxconn이 iMac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애플의 제품설계팀이 거의 1년 동안 공장에 살다시피 하며 기술과 품질 기준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급업체에는 새로운 제조기술과 경험이 남았습니다. Foxconn은 애플 주문에서 큰 이익을 남기지 못하거나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애플과 함께 일하며 익힌 기술을 수익성이 더 높은 다른 고객의 제품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애플이 더 어려운 디자인을 요구할수록 공급업체가 만들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넓어졌어요.
몇 년 뒤 iMac G4를 만들 때는 제조 과정의 비효율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핵심 조립과 공급망 팀이 여섯 나라에 흩어져 있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애플은 디자인을 타협하는 대신 제조방식을 바꿨습니다. 부품과 부분조립을 최종조립지 가까이 모았고, 여러 협력사가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하나의 산업 클러스터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서구기업이 중국에서 얻은 것은 비용의 자유였습니다. 낮은 비용으로 대규모 생산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애플이 얻은 것은 디자인의 자유였어요. 수천 명의 노동력을 빠르게 투입할 수 있었기에, 자동화하기 어렵고 만드는 법도 정해지지 않은 복잡한 디자인을 미리 단순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 자유의 조건도 보입니다. 주문이 몰리면 수천 명을 빠르게 투입하고, 12시간 교대근무와 야간근무를 이어갈 수 있는 노동환경이 함께 있었어요. 낮은 임금과 기숙사형 관리,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도 애플이 높은 기준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조건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높은 기준을 이야기할 때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높은 기준을 고수한다는 것
높은 기준을 가진다는 건 원하는 것을 처음부터 현실에 맞춰 미리 타협하지 않는 일입니다. 상대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무엇이 정말 불가능한지는 직접 부딪혀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현실의 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시험한 뒤 문제가 확인되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지금 가진 방법으로 어렵다는 것과, 하려던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구분해야 해요.
높은 기준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기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과 환경, 일하는 방식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기술이 다음 시도에 다시 쓰일 때, 실패도 새로운 능력으로 남습니다.
물론 그 기준의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내 목표를 미리 낮추지 않는 것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요.
원하는 것을 미리 타협하지 않는 것.
실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것.
한계가 확인되면 핵심은 지키고, 방법과 조건을 바꿔 해결책을 찾는 것.
애플이 보여준 높은 기준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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