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상 깊었던 이우환의 문장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제가 오래 품어온 화두 — 안목, 도야, 삶의 주도권 — 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문장이어서, 처음 읽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한참 눈이 머물렀습니다.

"나와 세계가 대화하는 속에서 작품이 태어난다. 세계는 나의 레벨에 준하여 반응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고도로 연마하고 엄격하게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양의의 표현>

세계는 나의 레벨에 준하여 반응한다니.

이우환에게 이건 창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작품은 내가 일방적으로 빚어내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런데 상대가 얼마나 깊이 답해주느냐는 내가 얼마나 깊이 건네느냐에 달린 일이잖아요. 그러니 세계가 시원찮게 응답한다면, 그건 세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내가 그만큼밖에 건네지 못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자칫 자신을 다그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어요. 나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칼자루를 슬며시 내 쪽으로 되가져오는 말이었거든요.

세계는 내가 마주할 준비가 된 만큼만 들어온다

세계는 내가 마주할 준비가 된 딱 그만큼만 응답해줍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 앞에 서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눈이 내게 없다면, 그 작품은 그저 눈앞을 스쳐 지나갈 뿐이지요.

물론 어떤 것들은 정말로 별 볼 일 없기도 합니다. 세계는 늘 깊고 풍요롭다는 말은 자칫 정신승리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진짜 시시한 것도 분명 있으니까요. 다만 제가 시시하다고 지나쳤던 것들 가운데, 실은 제가 아직 볼 눈이 없어서 놓쳤던 게 얼마나 많았을까를 떠올리면 조금 겸허해집니다.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은 한 구절이 오래 남아 있어요. 겉으로 보이는 세계의 풍요란 실은 내 안의 풍요가 비쳐 나온 것이라던. 결국 내가 보는 세계의 크기는 세계의 크기가 아니라 나의 크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목, 나를 초월하는 힘

안목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흔히 안목을 '잘 보는 능력'이라 여기지만, 어쩌면 그건 나를 벗어나는 능력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요.

안목이 부족할 때 우리는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대상에 비친 나를 봅니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면서 "이게 왜 이렇게 비싸?"를 생각하고, 주식 차트를 보면서 "아, 내가 저걸 놓쳤네"를 떠올립니다. 눈앞에 놓인 건 작품이고 시장인데, 정작 내 눈에 담기는 건 나의 선입견과 아쉬움입니다.

그러다 나를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하면 대상이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냅니다. 작품이 하려던 말이 들리고, 시장이 보내던 신호가 보이기 시작하죠. 제가 오래 곱씹어온 말 중에 "투명한 영혼으로 시장을 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잡음이 줄어든 만큼 세계가 선명해지는 거예요.

그러니 안목이 높아진다는 건 더 많은 것을 내 뜻대로 해석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뜻을 잠시 내려놓고, 대상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도록 기다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미학에서 '미적 태도', '미적 경험'이라 부르는 게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대상을 내 쓸모나 이해관계로 재단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보며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그렇게 보면 안목은 더 세게 판단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을 조금 늦출 수 있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전시를 꾸준히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엔 '이게 뭐지' 싶던 작품 앞에서 나를 내려놓고 천천히 머무르며 무심코 지나쳤던 서문까지 읽다 보면, 닫혀 있던 무언가가 슬며시 열리는 순간이 찾아오거든요. 예전엔 전시를 도장 깨듯 개수로만 봤는데, 요즘은 하나를 보더라도 그 여운이 며칠씩 남는 쪽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여기서 이우환의 문장이 한 겹 더 깊어집니다. 안목이 자라면 어제 무심히 스쳤던 그림이 오늘은 전혀 다른 깊이로 말을 걸어옵니다. 작품은 내가 자란 만큼 더 넓게 열리며 새로운 말을 건네오는 대화 상대에 가깝습니다.

겸손이라는 칼자루

세계가 시시하게만 보일 때 세계를 탓하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세계가 원래 그런 거라고 못 박아버리면 내가 어찌해볼 여지가 사라지니까요. 그런데 그 초라함을 아직 내가 덜 여문 탓으로 돌리는 순간, 나는 다시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더 갈고닦으면 되니까요.

그래서 이우환이 말한 겸손은 자기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칼자루를 세계가 아니라 내 쪽으로 다시 쥐는 일이지요. 세계를 탓하는 건 그 칼자루를 세계에 넘겨버리는 것이고, 나를 돌아보는 건 그 칼자루를 다시 손에 쥐는 것이니까요.

같은 태풍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재난이고, 누군가에게는 방향을 바꿀 신호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무언가를 지어 올릴 원료가 됩니다. 태풍이 달라진 게 아니에요. 그것을 받아내는 사람의 레벨이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세계를 탓하는 데 머무를수록 눈에 드는 건 재난뿐이고, 나를 갈고닦을수록 같은 태풍에서 신호가, 이윽고 원료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겠지요.

다만 이 말에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날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이 잣대는 오직 자신에게만 들이대야 한다는 것. 같은 말을 타인에게 겨누는 순간 "네가 힘든 건 네가 부족해서야"라는 차가운 말로 변해버리니까요. 이우환이 굳이 '자기를' 연마하라고 못 박은 것도 그래서였겠지요. 자신에게 들이대면 겸손이 되고, 타인에게 들이대면 오만이 되는 말입니다.

냉소라는 갑옷

그런데 레벨은 위로만 자라는 게 아니에요. 아래로 내려가는 길도 있고, 그 입구에 냉소가 서 있습니다.

저는 한때 냉소를 일종의 멋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공연을 보고 나와서는 "뻔하더라", "연주가 별로였어" 같은 말을 참 쉽게 내뱉곤 했지요. 무언가를 시큰둥하게 깎아내릴 때 스스로 조금 더 안목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건 안목이 높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안목이 없어서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취향에 꼭 맞지 않더라도 어떤 대상이 지닌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눈. 그 눈이 없으니 그냥 다 별거 아니라고 뭉개버렸던 거죠.

냉소는 어쩌면 세계를 향해 미리 둘러 입는 갑옷 같은 건지도 모릅니다. 실망하기 전에 먼저 기대를 접어버리는 선제 방어랄까요. 그런데 갑옷은 칼도 막지만 손길도 막습니다. 세계를 대충 마주하니 세계도 대충 응답하고, 그러면 "봐, 역시 별거 없잖아" 하며 확증하게 되고요. 세계가 초라해서 냉소하는 게 아니라, 냉소하는 만큼 세계가 초라해지는 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냉소의 반대편에 있는 건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감탄할 줄 아는 용기 같습니다. 감탄이란 "내가 아직 못 본 게 있구나" 하고 인정하는 일이고, 그 인정은 나를 잠시 낮추는 일, 곧 나를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어린아이는 세계에 쉽게 감탄합니다. 아직 냉소라는 갑옷을 입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세상을 조금 알게 되면 냉소가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같아요. 어설프게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하며 갑옷을 두르는 시기지요. 그리고 진짜 대가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감탄한다고 하더군요. 갑옷을 벗어도 될 만큼 안목이 깊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제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어린아이와 냉소가가 어정쩡하게 뒤섞인 자리 어딘가겠지요.

세계는 오늘도 나에게 응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계가 유난히 초라하고 시시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세계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었다기보다, 그 무렵 제가 세계를 마주하던 딱 그만큼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세계가 시시해 보이는 날이면, 세계를 탓하기 전에 저에게 먼저 묻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을까. 어떤 갑옷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을까. 그렇게 묻고 나면 조금 전까지 시시하던 세계가 슬며시 다른 얼굴을 내밀곤 합니다.

세계는 오늘도 나의 레벨에 준하여 반응하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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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나의 레벨에 준하여 반응한다

세계가 시시해 보일 때, 그건 세계 탓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탓일까요? 이우환의 한 문장을 따라 겸손이 어떻게 삶의 주도권이 되는지, 안목의 부재가 어떻게 냉소로 연결되는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