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충동이었습니다. 혹은 오래 묵혀둔 무의식이 이끈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년 키아프에서 메간 멘지스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특유의 서정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그 작품을 마주했을 때, 계획에도 없던 소장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 한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어떤 단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 찰나의 순간
'코모레비'(木漏れ日、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 찰나의 순간.
책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에서 이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나만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는 반가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아름다운 순간을 명명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설레임. 이후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그 감각을 영상으로 확인했을 때의 전율까지.
이제 그 코모레비가 캔버스에 담겨 마침내 제 공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발견하고 영화로 체감했던 그 아련하고 소중한 순간이, 이제는 제 곁에 실재하게 된 것입니다.
2. 빛과 빛이 포개질 때
집이 동향이라 아침 일찍부터 해가 깊숙이 들어옵니다. 캔버스에 담긴 빛 위로 실제 아침 햇살이 포개질 때면, 그림은 살아있는 풍경이 됩니다.

햇살 좋은 날 작품을 보고 집을 나서면 그 기운이 종일 저와 함께하는 듯합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그 빛의 잔상은 저를 지켜주는 은근한 힘이 됩니다. 이것이 컬렉팅이 주는 내밀한 기쁨일까요.
3. 나의 세계가 확장되던 순간
첫 컬렉팅 다음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아트 플랫폼 아트시(Artsy)의 기사 <5 Artists to Discover at Kiaf 2025>에 메간 멘지스가 소개되었는데, 기사에 실린 작품이 바로 제가 막 소장한 그 그림이었습니다.
단순한 우연 이상의 감동이었습니다. 저의 취향과 안목이 저만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듯한 기쁨, 그리고 감사함이었습니다.
4. 컬렉팅이 일깨워준 새로운 감각
첫 컬렉팅은 저에게 작품을 소장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선 감상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이전에는 막연히 '좋다', ‘내 취향은 아니다’고 느꼈던 것들이 이제는 '내 컬렉션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내 자아의 확장에는 어떤 역할을 할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감상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저만의 세계가 생겨났습니다. 홀로 집에 머무는 고요한 시간, 그림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그 자체로 깊은 명상이 됩니다. 아침의 햇살과 밤의 정적 속에서 작품과 교감하는 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롯한 저만의 세계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 작가들에게 이전보다 더 마음이 갑니다.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고, 어쩌면 우리가 함께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벅찬 포부도 품어봅니다.
자아의 확장을 꿈꾸게 합니다. 좁은 취향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나만의 컬렉션을 통해 그 지향점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싶습니다.
5. 컬렉션, 나의 나침반
컬렉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형태로 곁에 두는 일입니다. 그렇게 곁에 둔 작품은 제게 든든한 닻이 되어줍니다.
작품을 바라보며 삶의 지향점을 되새기고, 흔들릴 때면 다시금 중심을 잡습니다. 작품은 제 삶의 지향점을 비추는 거울이자, 길을 잃지 않게 돕는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결국 컬렉팅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고민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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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 나의 나침반 - 메간 멘지스 (Megan Menzies)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코모레비’. 메간 멘지스(Megan Menzies)의 작품을 통해 그 찰나의 빛을 곁에 두게 되었습니다.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형태로 소유하며, 삶의 지향점을 비추는 나침반을 갖게 된 첫 컬렉팅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