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음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가 저에게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다소 무겁고 심오한 주제를 다룰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화는 예상과는 다른 결의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독보적인 미감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눈부신 미장센, 감각의 향연

도입부의 음악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영화 내내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강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은 인물들의 감정선과 영화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조율하며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여기에 더하여 비비드하면서도 세련된 색감은 존엄한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섬세하게 배치된 듯한 미장센은 그 자체로 영감을 주었습니다. 색감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할 수 있다니요. 탁월한 미감은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전했습니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져, 영화라는 매체를 향유할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존엄한 죽음, 새로운 서사를 쓰다

영화는 우리에게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암 투병 과정에서 흔히 그려지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투병이라는 기존의 익숙한 서사 대신, 주인공은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기로 결연히 마음먹습니다. 그녀는 다가올 쇠락의 과정을 피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존엄을 지키려 합니다. 그 주체적인 선택이 너무나 멋지게 다가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2024년 3월 타계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네만이 떠올랐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했지만 스스로 조력사를 선택하며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던. 이는 그가 아내와 어머니의 인지 저하를 지켜보며 느꼈던 고통, 그리고 삶의 마지막 몇 년간 겪게 될지도 모를 고통과 존엄성 상실을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오랜 신념에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죽기 전 파리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삶을 마무리했다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 속 주인공의 여정과 겹쳐 보였습니다.

삶의 정점과 끝: 피크-엔드 룰 (Peak-End Rule)

카네만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가 주창한 이론을 증명해 보인 학자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피크-엔드 룰(Peak-End Rule)'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기억하고 판단할 때, 경험의 총 시간이나 평균적인 좋고 나쁨보다는 감정이 가장 고조되었던 순간(Peak)과 맨 마지막 순간(End)의 경험에 의해 전체 경험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즉 아무리 길고 즐거운 여행이었더라도 마지막 날 불쾌한 경험을 했다면 그 여행은 나쁜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힘든 경험이었더라도 절정의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긍정적이었다면 전체를 좋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카네만은 파리에서 가족들과 마법 같은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신중하게 계획된 계획을 따름으로써, 피크-엔드 룰에 맞춰 90년 인생의 행복한 결말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카네만은 자신의 삶 전체가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좋은 마지막(Good End)'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론과 삶을 일치시켰습니다.

가장 나다운 순간에 찍는 마침표

가장 좋은 순간에 마무리 짓는 것은 너무 빨리 그만두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마치 전성기 때 은퇴를 한 야구선수처럼요.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러한 통념이나 아쉬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의 마지막 장을 스스로 결정하며 아름답게 써내려갑니다. 이 용기 있는 선택, 스스로 써 내려간 ‘나만의 서사’가 어딘가 낯설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철학적인 질문과 선택을 너무나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뒷받침합니다. 삶의 빛나는 순간들을 담아내는 비비드한 색감,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정교한 구도, 마지막 순간의 아름다움을 함께하는 음악까지. 영화의 미장센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피크-엔드 룰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젊은 나에게는 아직 써야 할 마음이 남아있다

"나란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어"라는 주인공의 대사도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유한성을 직시하게 하는 강렬한 순간이었어요. 언젠가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겠지요. 언제까지 지금처럼 뜨겁게 무언가에 마음을 줄 수 있을까요. 써야 할 마음이 남아있을 때,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이 경험하고 더 깊이 느끼며 순간들을 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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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순간들로 맺은 삶의 아름다운 마침표 - 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룸 넥스트 도어'. 눈부신 미장센과 음악 속에서 '존엄한 죽음'과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써 내려가는 용기에 대해 생각합니다. 대니얼 카네만의 피크-엔드 룰과 연결하며, 우리 삶의 빛나는 순간들과 마지막 서사를 성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