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주식시장이었습니다. 저는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크게 부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주식은 하지 않는다"는 저만의 원칙이 있었고, 저는 그 원칙을 묵묵히 지킨 거라고 여겼습니다.

2021년에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현대차, 카카오. 온 세상이 주식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가 고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야기가 어딜 가나 들려왔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겹쳐 보였습니다. 모두가 열광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고점이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2021년과 2025년의 '상황'이 정말 같은 건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한국 주식시장을 다루는 Economist의 아티클을 읽었습니다. 기사는 한국주식의 강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과거의 결점이 갑자기 장점으로 변모했다."

이 한 문장에 멈췄습니다. 이전까지 약점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새로운 상황에서 강점이 됐다는 겁니다.

한국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역량은 전부터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그 역량이 필요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대상이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한 것.

그리고 그 변화를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 이름에 갇히다

저는 미국 주식을 하면서 AI 산업을 꽤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AI 모델이 커질수록 더 많은 GPU가 필요하고, GPU에는 고성능 메모리가 필수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HBM은 뺴놓을 수 없다는 것.

HBM은 단순한 부품이 아니었습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가 나올 때마다 필요한 HBM의 양은 늘어나고, 그걸 양산할 수 있는 회사는 전세계에 셋뿐이었습니다. 일시적인 수혜가 아니라 구조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식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자"가 아니라 "한국주식"이었으니까요. "HBM에 투자한다"고 생각했으면 진지하게 검토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주식"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순간, 저의 원칙이 자동으로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한국 산업은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한국 시장 전체가 검토 대상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미래 없다"는 서사를 받아들인 뒤 그 서사가 여전히 맞는지 한 번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고 있는데, 제 머릿속의 서사는 멈춰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분석을 못 한 게 아니었습니다. HBM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전에 있었습니다. 들여다보지 않기로 한 것은 분석할 수 없습니다.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저는 질문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2. 상황이 바뀌면 가치도 바뀐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2023년, 카바나(CVNA)라는 회사에 투자했습니다. 미국의 온라인 중고차 플랫폼인데, 당시 시장의 평가는 파산으로 쏠려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반대편에 섰습니다. 결과적으로 50배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2023년 카바나와 2025년 한국 주식. 지금 돌아보면 비슷하게 보입니다. 모두 상황이 바뀌면서 가치도 바뀌었습니다.

공격적인 부채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중고차 산업을 재편하던 카바나는 2022년 시작된 유례없는 금리인상기를 맞아 파산 직전까지 갔습니다. 공격적인 전략이 저금리 시대에는 빛을 발했지만, 고금리 시대에는 빛이 바랜 것입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HBM 기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량은 전부터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AI CAPEX가 폭발하면서 그 역량이 절실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카바나를 투자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그 자체로 좋은 자산, 나쁜 자산은 없다는 것. 어떤 상황에 적합한 자산이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투자의 본질은 미래의 상황을 예상하고, 그 상황에서 가치가 부각될 자산을 현재에 미리 선점하는 것입니다.


카바나 글에서 저는 이렇게 썼었습니다. "양질의 정보원에 꾸준히 귀를 기울이며, 그렇게 훔친 생각들을 나만의 논리로 만들고 기다렸기에 가능했습니다." 핵심은 '나만의 논리로 만들었다'는 부분입니다. 남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게 아니라, 서사를 의심하고 직접 검증했습니다. 한국 주식에서는 그 과정이 부재했습니다. '미래가 없다'는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이 여전히 맞는지 검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카바나에서 제가 했던 것을 복기하면 이런 과정이었습니다.

단계 질문 카바나 (작동) 한국 주식 (부재)
1. 의심 지금의 서사가 정말 맞는가? "파산한다"를 의심 → 직접 검증 "미래 없다"를 무비판적 수용
2. 속성 이 자산의 본질은 뭔가? BM 분석 → 속성 불변 확인 검토 자체를 안 함
3. 상황 지금과 미래의 상황은 어떤가? 공포가 과도하다고 판단 "원래 그런 시장"으로 전제
4. 시나리오 상황이 바뀌면? 비대칭 기댓값 발견 상상 자체를 안 함

카바나에서는 1단계가 작동했습니다. "정말 파산하나?" 하고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니까요. 한국 주식에서는 1단계 자체가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다'는 서사를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검증도 없었고, 검증이 없으니 기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황의 변곡점에서, 기존의 서사가 아직 변화하는 상황을 따라오지 못한 지점. 그곳에 기회가 있습니다. 아주 크나큰 기회가요.  카바나가 그랬고, 한국 주식이 그랬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걸 봤고, 다른 쪽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3. 원칙과 편향 사이

"한국주식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을까요, 편향이었을까요.

투자를 하지 않는 영역이 저에게 여럿 있습니다. 게임주나 엔터주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공부해도 모르겠거든요. 주술의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미술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감상은 제 취미지만, 예술투자는 제 능력범위 밖입니다.

그런데 한국 반도체는요? AI를 공부하면서 HBM의 구조적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잖아요. 그건 능력범위 밖이 아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인데도 '한국 주식은 미래가 없다'는, 원칙으로 위장한 편향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전에 시중(時中)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고정된 정답이 아닌, 상황과 맥락에 맞는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단단한 유연함.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투자에서는 지키지 못한 셈입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 원칙은 안 바뀐 거니까요.

복기를 하며 한 가지 단서를 찾았습니다. "왜 그런가"를 물었을 때, 구체적인 이유가 나오면 그건 원칙일 수 있습니다. "원래 그래"가 나오면 편향을 의심해야 합니다. 게임주를 왜 안 하느냐고 물으면 "봐도 판단 근거를 만들 수 없어서"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한국주식을 왜 안 하느냐고 물었다면, "원래 안 해"라고 답했을 겁니다.


그렇게 10만원짜리 하이닉스를 떠나보냈습니다. 하지만 놓친 수익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들여다보지 않기로 한 것은 분석할 수도 없다는 것. 상황이 바뀌었는데 서사가 따라오지 못한 지점에 기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원래 그래"가 나오는 순간, 그건 원칙이 아니라 편향일 수 있다는 것.

다음 기회가 보입니다.

10만원짜리 하이닉스를 놓치고 깨달은 것

"한국 주식은 미래가 없다"는 믿음이 10만 원짜리 하이닉스를 놓치게 만든 건에 대하여. 원칙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편향을 찾아내고, 시장의 판도가 바뀌기 전에 기회를 선점하는 법에 대해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