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은 유럽이 전 세계의 허영심에 부과하는 글로벌 세금이다."

요약

유럽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이에도, 전 세계 명품의 80%는 여전히 유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유럽이 파는 건 가방이나 구두가 아니라 '유럽식 삶의 방식에 대한 동경'입니다. 미국이 F-35를, 한국이 K-Pop을 수출할 때 유럽은 '품격'을 수출한다는 거죠. 명품 하우스들은 장인 부족을 내세워 희소성을 연출하지만, 실제 산업 규모는 2000년 이후 3배나 커져 연 3,580억 유로에 이릅니다. 기사는 이를 중세 교회의 면죄부에 빗대기도 해요 — 구매자가 '사회적 무명'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주는 장신구를 판다고요.

한편 가격 폭등으로 정작 유럽 중산층은 자국 명품을 사지 못하게 됐고, 샹젤리제에 늘어선 줄은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이 채우고 있습니다. 부유층의 관심은 물건에서 경험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합니다.

담은순간들 생각

읽으면서 계속 찔렸어요. "사회적 무명의 상태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한 장신구", "수작업으로 공들인 사기" — 그동안 저의 소비/경험은 heritage와 양질의 것들을 경험하면서 안목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런 표현들 앞에서 그 말들이 좀 궁색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저희 집 테이블 위에는 질샌더 구두가 놓여 있거든요. 산 지 2주쯤 됐는데 아직 한 번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고 있으면 좋아서요. 시선을 위한 거라면 당장 신고 나갔겠죠. 혼자서 테이블 위에 두고 보는 거니까, 이건 기사가 말하는 허영과는 다른 결의 기쁨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질문은 남아요. 패션에서 timeless니 heritage니 하는 말들이 어디서든 붙어 나오잖아요. 처음에는 브랜드마다 당연하다는 듯 붙이는 수식어가 남용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비판적인 눈이 무뎌진 것 같기도 해요. 소비의 즐거움이 — 그게 나를 알아가는 기쁨이든, 새로움에서 오는 도파민이든 — 비판적인 시선을 조용히 눌러버린 건 아닌가 싶어서요.

생각거리

패션에서는 아직 브랜드라는 이름 없이 자신 있게 고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클래식 음악에서는 비슷한 과정을 좀 더 앞서 겪었어요. 처음에는 거장의 공연은 숭배하듯이 들었습니다. 베를린 필이 연주하면 일단 나를 내려두고 듣게 되죠. 그러다 언젠가부터 듣고 나서 "이 악단이니까 좋은 거야"에서 멈추지 않고, 정말 좋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됐어요. 거기까지 오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브랜드든 거장의 이름이든, 그건 수십 년간 실제로 쌓여온 시간과 신뢰의 결이기도 해요. 무시할 게 아니라 존중할 만한 거죠. 다만 그 이름에 이끌려 새로운 걸 만나는 것과, 그 이름 안에 머무르는 것은 꽤 다른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한때 궁극의 안목은 브랜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요. 돌이켜보면 "나는 브랜드 같은 거 필요 없어"라고 선언하는 것도 "나는 그 수준에 이른 사람이야"라는 또 다른 포지셔닝이더라고요. 어쩌면 목표는 브랜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브랜드에서 멈추지 않는 것 — 신호로 읽되 거기서 끝내지 않는 것 — 이 아닐까 합니다.

안목이라는 건, 어쩌면 그 간극 사이에서 계속 걸어가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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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것 #2 — 럭셔리, 허영에 대한 세금?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명품 산업을 '중세의 면죄부'에 비유합니다. 2000년 이후 3배나 커진 명품 시장의 상업적 메커니즘을 파헤치고, 브랜드라는 이름 너머의 가치를 묻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