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어린이 프로그램인 ‘헤이 더기(Hey Duggee)’는 시청하는 데 7분이 걸리지만, 제작하는 데는 약 5개월이 소요됩니다."
요약
BBC의 어린이 프로그램 '헤이 더기(Hey Duggee)'는 시청하는 데 7분, 만드는 데 5개월이 걸립니다. 40명 이상이 제작에 관여합니다. BBC는 지금 세계 최대의 어린이 신작 콘텐츠 발주처입니다. 헤이 더기, 블루이(Bluey) 등 최근의 성공작이 전부 BBC 자금으로 탄생했어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BBC는 어린이 콘텐츠에 역사상 가장 적은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수입 대비 4%이던 지출이 2%로 줄었어요.
과거에는 상업 방송사들도 어린이 콘텐츠 제을 했어요. 그런데 정크푸드 광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상업 방송사들의 수익 기반이 무너졌고, 동시에 어린이 콘텐츠 의무 방영 규정이 완화되면서 아예 만들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유튜브도 한때는 대안이었지만, 13세 미만 아동 대상 광고 추적이 제한되자 수익이 80% 급감했어요. 넷플릭스와 디즈니+는 굳이 비싼 신작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 어린이 프로그램 발주를 절반 이하로 줄였고요. 지금 영국에서 수준 높은 어린이 신작을 만드는 곳은 사실상 BBC뿐입니다.
민간이 못 하니 공공이 나선 겁니다. 그리고 그 투자가 돌아왔어요. 블루이는 디즈니+가 거액을 주고 방영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IP가 되었고, BBC 스튜디오의 연간 매출은 22억 파운드에 달합니다. 헤이 더기는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중국에서 10억 뷰를 기록했고, 심지어 이란에서도 페르시아어로 더빙되어 방영됩니다. 기사는 만약 소프트 파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현지어 뉴스 방송만큼이나 애니메이션의 형태로도 발휘된다고 말해요. 영국이 이란에는 '작은 사탄'일지 모르지만, 그 사탄이 최고의 만화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기사는 이렇게 마무합니다. 양질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가로등, 군대, 공원과 같은 범주라고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시장이 공급하기 어려운 사회적 인프라.
담은순간들 생각
이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시장이 양질의 콘텐츠를 공급하는 데 실패하는 과정과 그 빈자리를 공공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유튜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면 선명해집니다. 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광고 추적을 제한하는 규제가 시행되었어요. 좋은 취지의 규제입니다.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규제가 시행되자 어린이 콘텐츠의 광고 수익이 80% 급감했습니다. 넘버블록스라는 수학 애니메이션의 제작사는, 유튜브 수익만으로는 운영비의 5분의 1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규제는 "나쁜 콘텐츠를 만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의도를 갖지 않았어요. 그런데 인센티브 구조가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유튜브에서 돈이 되는 건 제작비가 거의 안 드는 저급 콘텐츠뿐이 되었습니다. 5개월 걸려 40명이 만드는 헤이 더기 같은 건 구조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해진 거예요.
의도와 결과의 괴리. 이게 저한테는 꽤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나쁜 결과를 금지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사례가 보여주는 건, 직접적으로 금지하지 않아도 인센티브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좋은 의도의 규제가, 좋은 콘텐츠를 죽이는 결과로 이어진 거예요.
기사가 BBC를 "가로등, 공원과 같은 범주"라고 쓴 대목에서 멈추게 됩니다. 가로등은 아무도 켜달라고 요청하지 않아요. 밝혀져 있으니까 당연하게 여기죠. 그런데 가로등이 꺼지면, 그제서야 거리가 어둡다는 걸 알게 됩니다.
BBC가 어린이 콘텐츠에 쓰는 예산이 4%에서 2%로 줄었는데도 아직 버티고 있어요. 하지만 이 가로등이 꺼지면? 시장은 이미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디즈니+도요. 다시 켤 사람이 없어요.
"시장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많은 영역에서 맞지만, 어린이 콘텐츠처럼 프리미엄을 받을 수도 없고 광고로 회수할 수도 없는 곳에서는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7분짜리 만화를 5개월 동안 만든다는 대목에서 유독 마음이 갔습니다. 수도승이 필사본을 다루듯 매 프레임을 살핀다고요. 모노클이 좋아할 만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예적 태도가 시장에서 자생하기 어렵다는 게 슬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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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것 #7 — 7분짜리 영상을 5개월 동안 만드는 사람들
BBC는 7분짜리 만화에 5개월을 쏟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도의 규제가 인센티브 구조를 바꾸면서, 이런 콘텐츠가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