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는 올해의 단어로 'Slop'을 선정했습니다.

본래 '진흙'이나 '음식물 쓰레기' 등을 뜻하던 이 단어는, 이제 "인공지능(AI)이 쏟아내는 질 낮은, 영혼 없는 결과물"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검색 엔진 상단을 차지한 그럴듯하지만 알맹이 없는 게시글, 소셜 미디어를 뒤덮는 출처 불명의 영상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당신은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코노미스트지의 서늘한 진단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이제 이 '슬롭(Slop)'의 바다를 항해해야 합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진짜'를 가려내는 일은 점점 더 고단해지는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을 등대 삼아 나아가야 할까요?

1. What에서 Who의 시대로

오랫동안 우리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믿어왔습니다. 시각 정보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믿음에 근본적인 균열을 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앞의 이미지나 오디오가 더 이상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이미지와 영상 모두 AI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오랜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콘텐츠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변화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꿰뚫어봅니다.

"온라인 콘텐츠는 더 이상 스스로 그 진위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무엇(What)'이 게시되었는가보다 '누가(Who)' 게시했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다.
평판(reputation)과 출처(provenance)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AI 생성 콘텐츠의 범람은 '신뢰'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해진 지금, 검증된 계정 등 신뢰할 수 있는 소스를 통한 신원 확인과 평판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SNS에서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먼저 의심하게 됩니다. "이거 AI가 만든 가짜 아닐까?" 그러다 그 계정이 '내셔널지오그래픽' 공식 계정임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콘텐츠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것을 게시한 주체의 '평판'과 '출처'가 감동의 전제 조건이 된 것입니다. 신뢰가 흐릿해질수록 '진짜'를 찾아 헤매는 피로감은 깊어지고, '신뢰'라는 자산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귀해집니다.

2. '신뢰'라는 이름의 해자(Moat)

기업들은 이미 '생성형 엔진 최적화(GEO, Generative Engine Optimization)'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챗봇이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에 유리한 정보를 쏟아내도록 유도하는 기술입니다. 누군가의 의도대로 조작된 정보가 AI의 입을 빌려 '객관적 사실'인 양 전달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의 역할이 재조명됩니다. 이코노미스트나 뉴욕타임스 등 레거시 미디어가 오랜 시간 쌓아온 정통성과 신뢰야말로, AI 시대에 강력한 해자(Moat)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AI 모델과 달리 '책임의 주체(Accountability)'가 명확합니다. 오보를 내거나 신뢰를 잃으면 그 오랜 시간 쌓아온 평판이라는 자산에 치명상을 입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브랜드를 건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의 구조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불하는 유료 구독료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과거의 구독료가 단순히 콘텐츠를 보는 대가였다면, 이제는 "AI가 생성한 무책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책임을 지는 주체가 검증한 정보를 얻는 비용"이 됩니다. 비용을 치르더라도 '책임 소재가 분명한 진짜'를 보겠다는 인식은 머지않아 새로운 상식이 될 것입니다.

3. '비효율'이 주는 신뢰

생물학에는 '신호 효과(Signaling Eff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수컷 공작의 화려하고 무거운 꼬리가 대표적입니다. 생존에 불리할 만큼 거추장스러운 꼬리는 역설적으로 "나는 이 정도의 무거운 비용을 감당하고도 살아남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짜가 흉내 낼 수 없는 '비용이 드는 신호(Costly Signal)'가 됩니다.

AI가 만든 콘텐츠(Slop)는 생성 비용이 '0'에 수렴합니다. 누구나 1초 만에 그럴듯한 글과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행위가 강력한 신뢰의 신호가 됩니다. (The Economist)

종이 신문·잡지, 물성을 가진 책은 만드는 데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듭니다. 물리적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편집, 감수, 제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생성하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와 달리, 한 번 인쇄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무거운 리스크와 투입된 비용이 콘텐츠의 질을 담보하는 필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 매체나 신뢰하는 사람의 안목에 기꺼이 마음을 여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섞어 1초 만에 가장 '평균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반면, 어떤 이의 탁월한 안목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긴 세월이라는 '막대한 시간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단순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해낸 '큐레이션', 그리고 그 이름이 보증하는 단단한 '신뢰'와 '브랜드'의 가치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 매체. 이러한 아날로그적 방식과 큐레이션은 비효율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나는 가짜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고귀한 증명일 수 있습니다.

4. 슬롭(Slop) 속에서 항해하는 법

슬롭(Slop)의 범람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선명하게 비춰줍니다. 소음이 커질수록 안목은 더욱 중요해지고, 가짜가 판칠수록 검증된 신뢰라는 자산은 더욱 귀해집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닙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는 일입니다. 지난 글(소음 너머 '진짜'를 보는 눈)에서 다루었듯, 꾸준히 양질의 큐레이션을 접하고 아날로그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소음 너머의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해상도 높은 눈을 갖는 것. 슬롭(Slop)의 바다를 건너는 단단한 무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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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Slop - 소음의 바다에서 신뢰라는 등대를 찾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 'Slop'. AI가 쏟아내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What)'이 아니라 '누가(Who)'입니다. 신뢰와 평판, 그리고 비효율이 갖는 역설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