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챗봇은 이제 단 한 명의 청중, 바로 당신만을 위해 만든 피자 한 조각을 내놓을 준비가 돼 있다.”
기사 요약
여행 정보를 얻는 방식이 가이드북에서 리뷰 플랫폼으로, 다시 TikTok과 AI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AI도 TikTok처럼 사람들을 똑같은 장소로 몰고 갈 것 같지만, 기사는 반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AI는 사용자의 취향과 과거 맥락을 반영해 사람마다 다른 여행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대중에게 가장 좋은 곳이 아닌, 한 사람에게 가장 맞는 곳을 추천하는 거죠.
담은순간들 생각
AI가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로웠지만, 개인화가 늘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필터버블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나에게 맞는 것”을 잘 찾아주는 능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제가 아직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을 만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AI가 제가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볼게요. 현대미술 공간을 추천하고, 제가 만족하면 다음에도 현대미술을 추천합니다. 그러면 AI는 제가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고, 저는 다시 그 안에서 만족합니다.
추천은 정확해지는데, 저는 조금씩 좁아집니다. 사람마다 다른 곳을 추천할 수 있어도, 제게는 매번 ‘나다운 것’만 반복될 수 있는 거예요.
개인화라는 말을 수요자 쪽에만 가두지 않고, 공급자가 자기 취향과 안목으로 세계를 큐레이션하는 방식까지 확장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젠가 읽은 이코노미스트의 「Why travel guidebooks are not going anywhere」에서는 여행 가이드북의 차별성은 더 이상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담는 데 있지 않고, 진정성과 큐레이션에 있다고 했습니다. 정보가 넘칠수록 오랜 시간 쌓인 신뢰와 브랜드의 안목이 중요해진다는 거죠.
AI가 제공하는 건 수요자 쪽의 개인화입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제게 맞는 여행지와 피자집을 골라주는 거죠. 큐레이션은 공급자 쪽의 개인화로도 볼 수 있습니다. Lonely Planet이나 제가 좋아하는 Monocle은 편집자들의 취향과 안목을 통과한 세계를 독자에게 건넵니다. 저는 그들이 고른 세계를 믿고, 제 취향 바깥을 바라보게 됩니다.
AI는 우리 모두를 같은 장소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각자를 자기 취향 안에 가둘 수도 있습니다. 반면 편집자의 안목은 낯선 세계로 독자를 초대해 독자의 취향을 넓혀줄 수 있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이미 좋아하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데서, 제가 아직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을 만나는 쪽으로 향합니다. 제 취향 바깥으로 일부러 한 걸음 나가보는 탐색(exploration)을 남겨두고 싶은 거죠.
독서모임을 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혼자라면 고르지 않았을 책을 만나기도 하고, 같은 책을 전혀 다르게 읽어낸 사람의 해석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제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주는 알고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서모임은 제 안에 다른 입력을 넣는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추천은 제 취향을 정확히 맞히는 일일까요. 제 취향 바깥까지 데려가는 일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기술을 단순한 소프트웨어 배포로 취급하는 것은, 마치 신비한 외계 유물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즉시 책상 위 장식품으로 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례 없이 강력한 무언가가 도착했는데, 우리는 그걸 책상 한 켠의 장식품으로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 상상력이 납작해지는 순간
몰릭은 'de-weirding'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기묘함을 지워내는 일' 정도가 될까요. 낯설고 정체불명인 것을 낯익은 범주에 끼워 맞춰, 안전하고 다룰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것. 그는 그것이 AI 앞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라고 말합니다.
"AI를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익숙한 도구나 작업 흐름에 통합하는 것은 현명한 공학적 접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매끄러운 인터페이스로 인해 이 기술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이해까지도 단순화해버리는 데 있습니다."
매끄러운 인터페이스는 사용을 쉽게 만듭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기술로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지까지 납작하게 만듭니다. AI를 '더 똑똑한 구글'이나 '더 빠른 워드'로 대하는 순간, 우리는 구글이나 워드로 할 수 있는 상상 안에 갇힙니다.
몰릭은 그 결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회의록 필사, 수십 장의 메모, 끝없이 쏟아지는 파워포인트. 없던 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 AI를 쓰는 것. 그는 이것을 '워크슬롭(workslop)', 말하자면 작업 쓰레기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스레드(Threads)를 열면 이런 게시물들이 타임라인을 채웁니다. "AI로 하루에 인스타 피드 50개 만드는 법", "ChatGPT로 블로그 글 100편 양산하는 프롬프트." 화려한 섬네일과 자신감 넘치는 문장들. 처음 몇 초간 "오, 멋진데" 하고 혹합니다. 그런데 몇 초가 더 지나면 어김없이 현타가 찾아옵니다.
무엇이 남는 거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빨리 만들어내는 것. 그 화려한 방법론들은 결국 몰릭이 말한 '워크슬롭' 생산법의 세련된 포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강력한 기술을 손에 쥐고, 그것으로 쓰레기를 더 빨리 만드는 법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2. 부지런한 지능에 감탄하지 말라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에는 제가 자주 되새기는 구분이 있습니다. 지능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지능'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을 대신 해줍니다. 원래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너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서 엄두가 안 나던 일들이요. 효율의 영역입니다.
'거대한 지능'은 좀 다릅니다. 인간이 애초에 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규모를 보여주고, 우리가 닿을 수 없었던 패턴을 찾아냅니다. 초월의 영역입니다.
송길영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하기 힘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고민하고 찾는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오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저에게는 묵직한 당부로 읽혔습니다. 부지런한 지능이 해주는 일에만 감탄하지 말라는 이야기로요. 저는 감탄하는 쪽이었거든요. AI가 한 시간 걸릴 작업을 10초 만에 해낼 때마다 "와" 했고, 감탄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새 도구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부지런한 지능의 영역 안에서 도구를 갈아타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던 거예요.
몰릭의 언어로 이 구분을 옮겨 보면 이렇게 됩니다.
부지런한 지능 = 자동화(automation)입니다. 기존에 하던 일을 더 빠르게 하는 것.
거대한 지능 = 증강(augmentation)입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몰릭은 이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업이 AI로 생산성이 30% 올랐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 리더들은 본능적으로 "그러면 인력을 30% 줄이자"고 생각합니다. 그 산수는 쉽습니다. 정작 어려운 질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한 명의 프로그래머가 100배 더 많은 코드를 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새로운 제품이 가능해지는가? 어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가?"
30%를 감축할지, 100배로 무엇을 새로 만들지. 같은 도구를 두고도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열리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전자는 산수가 풀어주는 질문이지만, 후자는 누구도 답을 대신 해줄 수 없는 질문입니다.
3. '어떻게'의 방에서 '왜'로 나오기
지난 몇 달간 저는 AI로 참 많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노션 문서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변환기, 투자 스크리너, 지식 관리를 위한 여러 도구들.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저는 꽤 능숙하게 답해왔습니다.
몰릭의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지를 묻느라, '왜' 하는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파이프라인을 다듬고, 도구를 하나 더 얹는 일에 저는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작업들은 전부 의미가 있었고 성취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몰릭의 질문 앞에서 저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00배의 생산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것"에 대해 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몰릭이 기업에 던진 이 질문을 저 자신에게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AI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어떻게'의 질문이 아닙니다. '무엇'과 '왜'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답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의 질문은 검색하면 답이 나옵니다. 누군가 먼저 해본 사람이 있고, 따라 할 방법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될 수 있는가'는 달라요. 아무도 대신 답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도망갑니다. 답할 수 있는 작은 질문들로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요약할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생산할까", "어떻게 하면 이 작업을 자동화할까". 이 질문들은 전부 쓸모 있습니다. 어느 영역에서는요. 하지만 저는 이 질문들이 제 사유를 미루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어떻게'의 방은 따뜻하고 안전합니다. 그 안에 있으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묻지 않아도 되거든요.
4. 모든 순간이 나의 도메인을 만든다
다만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서 저를 오래 붙잡아둔 다른 생각도 있었어요.
"그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도메인(domain)이 있어야 할 텐데..."
한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 AI를 쓸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쓸 때, 결과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도메인이 없으면 AI는 그저 도구일 뿐이지만, 도메인이 있으면 AI는 증폭기가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제가 "도메인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투자에서는 대가들의 렌즈를 빌려 보고, AI에 대해서도 여러 전문가의 렌즈를 빌려 보고. 어디에서도 저만의 깊이가 없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그 생각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메인'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었거든요. 의사의 의학, 변호사의 법, 애널리스트의 재무. 그런 식의 단일 전문성만이 도메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니 "나는 도메인이 없다"고 스스로 판정해버린 것이지요.
그 좁은 정의를 내려놓고 지난 몇 년의 저를 돌아보니, 저는 한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투자를 공부하다가 예술로 건너가고, 예술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다시 기록과 지식을 쌓는 방법으로. 어떤 이름표도 저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오랫동안 마음을 주고, 고민하고, 사유하고, 서로 연결해온 자리들이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을 뿐, 전부 제가 진심으로 들여다본 영역이었어요.
내가 오랫동안 마음을 준 것들. 그것도 도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꼭 학위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투자와 예술처럼 이질적인 관심사들이 만나는 교차점도 하나의 도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교차점이야말로 가장 희귀한 도메인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도메인이 없다'는 느낌은 결국 도메인을 좁게 정의한 결과였습니다. 저 자신에게 행한 탈기묘화였던 셈입니다. 저의 낯선 조합을 익숙한 범주에 끼워 맞추려다, 거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도메인이 없다"고 판정해버린 것이니까요. 몰릭이 기업에 대해 한 지적이, 제가 저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순간이 저의 도메인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 한 편의 글, 지난주에 들렀던 전시, 지난달에 복기했던 투자.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을지라도, 그 전부가 언젠가 거대한 지능과 만날 때 쓰일 재료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순간이 더 재미있어집니다.
마치며
여전히 저는 "나는 AI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선명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 같습니다. 누구도 답을 대신 해줄 수 없는 질문이니까요.
다만 AI를 다룰 때 품는 질문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걸 더 빨리 할 수 있지'에서 '내가 이걸로 무엇이 될 수 있지'로. '무엇을 자동화할까'에서 '무엇을 새로 상상할까'로. 방 하나를 옮겨 다니는 일일 뿐인데, 그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꽤 다릅니다.
그리고 저녁에 스레드를 열 때, 'AI로 하루에 피드 100개 만드는 법' 같은 게시물이 눈에 들어오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저걸 따라 할지 말지가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엄청난 기술 앞에서 어떤 질문을 고른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리고 같은 물음이 저에게도 돌아옵니다. 너는 어떤 질문을 고르고 있느냐고.
'더 많이, 더 빨리'의 자리에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조용히 놓아두고, 그 질문 앞에 잠시 머물러 보려 합니다. 매일의 그 작은 머무름이, 언젠가 저를 낯선 영토 어딘가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면서요.
"한때 노키아는 맥도날드나 구글 같은 기업을 제치고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치 있는 브랜드로 선정되었으며, 글로벌 휴대폰 시장의 40% 이상을 장악했습니다."
요약
한때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40%를 점유하며, 맥도날드나 구글보다 높은 브랜드 가치를 자랑했던 노키아. 그러나 스마트폰 전환기에 밀려 2013년 휴대폰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습니다.
기사는 이후 노키아가 6G·AI 네트워크 기업으로 부활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그 부분은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구글보다 가치가 높았던 회사가 게임이 바뀌는 순간 밀려났다는 것. 이게 워낙 인상 깊었거든요.
담은순간들 생각
노키아라는 이름을 요즘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20년 전에는 구글보다 가치가 높았다니, 꽤 충격이었습니다.
소로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게임을 잘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 게임이 언제 바뀌는지 알려고 노력해라." 노키아에 대입하면 이렇게 읽혀요. 자신의 장점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장점이 여전히 유효한지, 다가오는 시대에는 어떤 것이 엣지가 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노키아를 성공하게 만들었던 건 견고함과 신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아니게 됐어요. 잘못해서 진 게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엣지가 바뀌어버린 겁니다.
노키아의 사례를 보면서 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맥락을 읽는 걸 제 강점이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그게 점점 AI가 잘하게 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정보를 엮고, 패턴을 찾고, 요약하는 것. 노키아의 견고함이 소용없어졌듯, 제 강점도 가치가 없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엮는 행위보다, 무엇을/어떻게 엮을지 생각하는 안목 쪽이 아닐까 싶어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이건 중요하고 저건 아니라고 가려내는 것, AI한테 뭘 시키고 뭘 직접 할지 판단하는 것. 결국 그 안목이 남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그 안목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면, 두 가지가 떠올라요.
하나는 특정 분야에서의 깊이(도메인 지식)입니다. AI가 깊이를 보완해주니까 저는 넓게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좀 위험한 것 같아요. 도메인 지식 없이는 AI한테 물어봐도 그 답이 맞는지 틀린지를 가릴 수가 없거든요. 어떤 도메인에서 임계점을 넘는 깊이가 있어야 AI가 내놓는 결과물을 평가할 수 있고, 그래야 연결도 의미가 생기는 거니깐요.
다른 하나는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생산자가 되어보는 경험)이에요. 최근에 AI를 활용해서 카드뉴스와 쇼츠를 만들어보기 시작했는데, 이전에는 소비만 하던 콘텐츠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용보다 형식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레퍼런스로 수집하게 되고. 이전에는 이쁘다/잘 만들었다 정도로 넘어갔던 것들이 한번 만드는 쪽에 서보니까 전혀 다르게 다가왔어요. 해상도가 높아진거죠.
결국 안목이라는 건 경험을 쌓고, 실패를 소화하고, 특정 영역에서 자기만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거 아닌가 싶어요.
1993년 어도비가 PDF를 처음 내놓았을 때 가트너의 한 컨설턴트가 남긴 말입니다. 전화선 인터넷으로 메가바이트짜리 파일을 다운받아야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어도비 이사회조차 프로젝트를 접고 싶어 했고요. 하지만 디지털 파일 공유가 일상이 되면서 PDF는 살아남았고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2조 5천억 개 이상의 PDF파일이 존재할 만큼 표준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AI가 PDF를 잘 읽지 못한다는 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단 레이아웃을 엉뚱한 순서로 읽거나 머리말과 꼬리말을 혼동하면서, AI 환각 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는 거죠. 팩티파이(Factify) 같은 스타트업은 AI에 맞는 새 형식으로 대체하겠다고 나섰고, 어도비와 구글은 PDF를 더 잘 읽게 만드는 쪽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담은순간들 생각
1993년의 가트너 컨설턴트는 당시 기준으로는 맞았습니다. 느리고 무겁고 불편했으니까요. 다만 보지 못한 게 있었어요. 태풍이 오고 있다는 것. 인터넷이 전화선에서 초고속으로 바뀌고 미국 국세청이 PDF를 공식 양식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결국 아무도 불편하다고 하지 않게 됐습니다.
저도 비슷한 문제를 겪어봤습니다. PDF를 AI로 읽으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텍스트 추출이 깨지고 표가 뭉개지고 다단 레이아웃이 엉키더라고요. 한글 파일(hwpx)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동안은 해결책을 찾아 이 도구 저 도구 옮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개발자가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걸'2개월짜리 문제'라고 부릅니다. 지금 안 풀리는 기술적 문제가 있어도 억지로 풀지 말고, 2개월만 기다리면 모델이 업데이트되면서 해결된다는 거예요. PDF에서도 어도비와 구글이 이미 움직이고 있고요. hwpx 파일은 제미나이를 기점으로 클로드도 이제는 잘 읽죠. 방향이 보이고 남들도 달려드는 문제라면, 굳이 직접 해결하려 애쓰기보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지 않을까 합니다.
생각거리
PDF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최근 'SaaSpocalypse'라는 말이 돌고 있는데, AI가 기존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직접 해내기 시작하면서 구독형 소프트웨어(SaaS) 산업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당연했던 것들이 '종말'이라는 선언 앞에 놓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AI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오랜 시간의 검증을 거친 것들이 실제로 교체되는 건 꽤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2조 5천억 개의 PDF, 그 위에 수십 년째 얹혀 있는 기업 시스템이 그렇게 쉽게 걷어지진 않을 테니까요.
본래 '진흙'이나 '음식물 쓰레기' 등을 뜻하던 이 단어는, 이제 "인공지능(AI)이 쏟아내는 질 낮은, 영혼 없는 결과물"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검색 엔진 상단을 차지한 그럴듯하지만 알맹이 없는 게시글, 소셜 미디어를 뒤덮는 출처 불명의 영상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당신은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이제 이 '슬롭(Slop)'의 바다를 항해해야 합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진짜'를 가려내는 일은 점점 더 고단해집니다. 무엇을 등대 삼아 나아가야 할까요?
1. What에서 Who의 시대로
오랫동안 우리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믿어왔습니다. 시각 정보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믿음에 근본적인 균열을 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앞의 이미지나 오디오가 더 이상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이미지와 영상 모두 AI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오랜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콘텐츠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온라인 콘텐츠는 더 이상 스스로 그 진위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무엇(What)'이 게시되었는가보다 '누가(Who)' 게시했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다. 평판(reputation)과 출처(provenance)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AI 생성 콘텐츠의 범람은 '신뢰'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해진 지금, 검증된 계정 등 신뢰할 수 있는 소스를 통한 신원 확인과 평판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SNS에서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먼저 의심하게 됩니다. "이거 AI가 만든 가짜 아닐까?" 그러다 그 계정이 '내셔널지오그래픽' 공식 계정임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콘텐츠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것을 게시한 주체의 '평판'과 '출처'가 감동의 전제 조건이 된 것입니다. 신뢰가 흐릿해질수록 '진짜'를 찾아 헤매는 피로감은 깊어지고, '신뢰'라는 자산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귀해집니다.
2. '신뢰'라는 이름의 해자(Moat)
기업들은 이미 '생성형 엔진 최적화(GEO, Generative Engine Optimization)'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챗봇이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에 유리한 정보를 쏟아내도록 유도하는 기술입니다. 누군가의 의도대로 조작된 정보가 AI의 입을 빌려 '객관적 사실'인 양 전달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의 역할이 재조명됩니다. 이코노미스트나 뉴욕타임스 등 레거시 미디어가 오랜 시간 쌓아온 정통성과 신뢰야말로, AI 시대에 강력한 해자(Moat)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AI 모델과 달리 '책임의 주체(Accountability)'가 명확합니다. 오보를 내거나 신뢰를 잃으면 그 오랜 시간 쌓아온 평판이라는 자산에 치명상을 입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브랜드를 건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의 구조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불하는 유료 구독료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과거의 구독료가 단순히 콘텐츠를 보는 대가였다면, 이제는 "AI가 생성한 무책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책임을 지는 주체가 검증한 정보를 얻는 비용"이 됩니다. 비용을 치르더라도 '책임 소재가 분명한 진짜'를 보겠다는 인식은 머지않아 새로운 상식이 될 것입니다.
3. '비효율'이 주는 신뢰
생물학에는 '신호 효과(Signaling Eff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수컷 공작의 화려하고 무거운 꼬리가 대표적입니다. 생존에 불리할 만큼 거추장스러운 꼬리는 역설적으로 "나는 이 정도의 무거운 비용을 감당하고도 살아남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짜가 흉내 낼 수 없는 '비용이 드는 신호(Costly Signal)'가 됩니다.
AI가 만든 콘텐츠(Slop)는 생성 비용이 '0'에 수렴합니다. 누구나 1초 만에 그럴듯한 글과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행위가 강력한 신뢰의 신호가 됩니다. (The Economist)
종이 신문·잡지, 물성을 가진 책은 만드는 데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듭니다. 물리적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편집, 감수, 제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생성하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와 달리, 한 번 인쇄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무거운 리스크와 투입된 비용이 콘텐츠를 함부로 내놓기 어렵게 하는 필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 매체나 신뢰하는 사람의 안목에 기꺼이 마음을 여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섞어 1초 만에 가장 '평균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반면, 어떤 이의 탁월한 안목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긴 세월이라는 '막대한 시간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단순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선별해낸 '큐레이션', 그리고 그 이름이 보증하는 단단한 '신뢰'와 '브랜드'의 가치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 매체. 이런 아날로그적 방식과 큐레이션에는 시간과 수고가 듭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그 수고가 "나는 가짜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4. 슬롭(Slop) 속에서 항해하는 법
슬롭(Slop)의 범람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선명하게 비춰줍니다. 소음이 커질수록 안목은 더욱 중요해지고, 가짜가 판칠수록 검증된 신뢰라는 자산은 더욱 귀해집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닙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는 일입니다. 지난 글(소음 너머 '진짜'를 보는 눈)에서 다루었듯, 꾸준히 양질의 큐레이션을 접하고 아날로그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소음 너머의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해상도 높은 눈을 갖는 것. 슬롭(Slop)의 바다를 건너는 단단한 무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정보의 양이 질을 압도하는 시대, 인공지능(AI)이 생성하는 방대한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을까요? AI는 대개 최고의 자료보다는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를 우선시하며, 방대한 빅데이터를 학습시킨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그럴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루지 못한 채 피상적인 답변을 내놓곤 합니다. 그 '그럴듯함'은 때로 더 큰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안목은 단순히 많은 데이터를 접하는 것만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꾸준히 '양질의 것들'을 의식적으로 접하고, 깊이 있게 소화하는 과정을 통해 연마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안목'을 기르고,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AI와 빅데이터의 그럴듯함, 그 이면의 함정
인공지능은 기존의 널리 알려진 방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요약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활용하는 정보의 '질'까지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질의 자료보다는 온라인상에서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자료를 우선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제되고 검증된 내용을 담고 있는 유료 구독이 필요하거나 특정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고급 정보보다는, 대중적인 뉴스 기사나 블로그 게시물처럼 즉각적으로 확보 가능한 출처를 참고하는 것이죠. 이는 결과적으로 정보의 편향이나 피상적인 분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진정한 통찰과는 거리가 먼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빅데이터'에 대한 맹신 역시 경계해야 할 지점입니다.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질 높은 분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부동산 빅데이터를 투입하여 분석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결과물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의 복잡성과 미묘한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된 내용이 더 큰 오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함마저 들었습니다. 그럴듯함에 속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진짜'를 알아보는 힘: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
그렇다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해야 그럴듯함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은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exposure)'에 있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접하는 것을 넘어,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만나느냐가 우리의 감각과 지성을 단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각이나 지성이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상시로 노출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자극을 줍니다. 그러나 자극은 다양할수록 좋겠지요. 독서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시, 답사, 강연에 참여하는 일, 그리고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양질의 자극 속에 자신을 놓아두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목은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꾸준히 양질의 자극을 통해 단련하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양질의 경험을 찾아 나서고 다양한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주체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알고리즘의 유혹: 보이지 않는 손에 흔들리는 선택
하지만 이렇게 의식적으로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자신을 노출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 알고리즘 때문입니다. SNS 피드, 쇼핑몰의 추천 상품,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알고리즘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알고리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고, 결과적으로 취향의 단순화·몰개성화·획일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한 기사는 이러한 '알고리즘 불안(Algorithmic Anxiety)' 현상을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을 갖기 전에 원하는 것을 예측하고 추천합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원하도록 교묘하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홍수 속 나만의 안식처: 양질의 큐레이션과 종이 잡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고리즘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양질의 정보를 선택하고, 소셜 미디어 피드 바깥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탐구할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양질의 큐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데 있습니다.편집자의 깊이 있는 안목과 철학이 담긴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제공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자극과 깊이 있는 관점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양질의 큐레이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잡지', 특히 '종이 잡지'입니다.
종이 잡지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콘텐츠와 우연히 마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온라인 환경에서는 자신의 관심사를 벗어나는 정보를 만나기 어렵지만, 종이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주제나 이미지와 연이 닿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지금은 검색어조차 떠올리기 어려운 머나먼 과거의 콘텐츠나 분위기를 접하는 데에는 종이 잡지만큼 좋은 매체도 드뭅니다. 저 역시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을 때 종이 잡지를 많이 활용하곤 합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죽 훑어보다가 아이디어나 작업의 방향과 연결될 만한 이미지를 발견하면 스크랩하여 아이디어 보드를 만들곤 했는데요, 이러한 과정 자체가 알고리즘의 추천과는 다른 즐거움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시대의 거울, 문화의 기록: 한 시대를 대표한 잡지의 힘
종이 잡지가 지닌 이러한 발견의 즐거움과 자극은, 잡지가 한 시대의 문화와 지성을 깊이 있게 담아낸 '양질의 큐레이션'의 정수일 때 더욱 커집니다. 저는 2년 전 주말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 GQ 국내판을 정주행했는데요, '종이 잡지'를 주제로 다룬 잡지(어반라이크 34호)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GQ 초기판에 보낸 뜨거운 찬사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패션을 비롯, 문화 전반에 걸친 강렬한 콘텐츠로 대한민국 잡지 저널리즘의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을 기록했다”
"GQ 초기 에디션, 창간호부터 2~3년 정도를 좋아한다. 당시 GQ가 쏟아냈던 콘텐츠는 그야말로 폭격이었다. 당시 에디터들(이충걸, 문일완, 송원석, 정석헌, 장우철)이 썼던 기사는 지금 봐도 훌륭하다. 도발적인 아젠다를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같은 사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매체였다. 잡지가 뭘 해야 하는지, 잡지의 갈 길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그 시절의 GQ를 읽으며 이 코멘트들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잡지가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였던 2000년대 초반, GQ는 주제 선정·필진의 역량· 섭외력 등 모든 면에서 그야말로 끝판왕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잡지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 시대적 소명은 다했을지언정, 그 정신성은 여전히 영원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양질의큐레이션이 담긴 종이 매체를 통해, 평소 제 관심 분야가 아니었거나 온라인이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깊이 있는 콘텐츠들을 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추후 담은순간들에 과거 잡지에서 받은 영감도 다룰 예정입니다.)
오래된 미래: 낡은 잡지에서 발견하는 시간의 지혜
발행된 지 시간이 꽤 흐른 잡지에서는 현재의 일회성 리뷰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독특한 관점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최신 정보가 아니라는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시대의 고민과 지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이 너무나 큽니다.
10년도 더 된 '매거진 B' 에이솝 편(2013년 발행, 당시 브랜드명은 이솝이 아니라 '에이솝'이었습니다!)을 다시 펼쳐보며,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가 된 이솝의 초기 철학과 당시의 시대상을 느끼며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습니다. 또 5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모든 잡지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뿌리 깊은 나무'를 들춰보며 이 시대에 느끼기 힘든 정신성과 깊이에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잡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잘 보존된 '타임캡슐'로서, 현재의 획일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창을 열어줍니다.
동시대를 보는 눈: 동시대 잡지의 역할과 가치
과거의 잡지들이 시간의 깊이를 통해 빛나는 통찰을 제공한다면, 동시대와 발맞추며 현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곁의 양질의 잡지들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과거의 지혜와 동시대의 흐름이 균형 있게 만날 때 비로소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있는 시각과 신뢰할 만한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는 동시대의 잡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꾸준히 보아야 합니다. (저는 정밀한 팩트에 기반하여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국제 정세를 짚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비즈니스·문화·디자인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을 제시하는 '모노클(Monocle)'을 꾸준히 구독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안목 있는 편집자의 철학이 담긴 양질의 큐레이션을 꾸준히 접하는 습관은, 단편적인 정보의 파편을 넘어 세상을 읽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구축하고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만의 리듬 찾기: 디지털을 넘어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으로
의식적으로 양질의 잡지를 찾아 읽는 행위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정보 소비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적 경험'의 가치로 이끌기도 합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잔카를로 발레(Giancarlo Valle)는 프로젝트에서 실제가 축소된 모형을 중요하게 활용하는데요, '모노클(Monocle)'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접근이 "인터넷 알고리즘에 대한 우리 스튜디오의 해독제"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었고 모두가 같은 것을 봅니다.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analogue algorithm)을 만들지 않는 한 그 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디지털 콘텐츠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은 의도적으로 다른 리듬과 질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줍니다. 목적 없이 산책하며 마음 가는 대로 향하기, 목적 없이 서점을 거닐며 우연히 발견한 책을 들춰보는 것, 하루 중 특정 시간만이라도 의도적으로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주변을 관찰하거나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날로그적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나 옥스포드 영어 사전 같은 전통적인 레퍼런스를 여전히 활용하는데요,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자료가 주는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정보에 즉시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깊이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컴퓨터 파일이 아닌 손으로 직접 노트에 정리하는 그녀의 오랜 습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처럼 그녀에게 물리적 실체가 있는 책과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디지털의 무한한 접근성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생산성과 사유의 깊이를 가져다주며,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정보를 체화하는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의 좋은 예입니다.
우연한 발견과 '공예적 즐거움'
제니퍼 이건이 언급한 물리적 매체와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은, 종이 매체가 선사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의 신문이나 잡지에는 편집자의 고뇌와 안목이 담긴 야심 찬 기획이나 실력 있는 필자의 깊이 있는 칼럼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독자들은 설령 그 기사를 읽으려고 산 것이 아닐지라도, 이왕 샀으니 아까워서라도 한번은 읽게 되고, 예상외로 새로운 영감을 얻어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예상 밖의 콘텐츠 소비'는 종종 효율성과 '가성비'라는 잣대에 밀려 무용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우연한 만남과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과정 속에 창의성과 다채로운 사유가 싹트는 토양이 마련됩니다.
종이 매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생각을 메모하는 그 모든 아날로그적 행위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며, 여기에는 디지털이 제공하기 어려운 '공예적 즐거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선택하고, 관계 맺는 주체적인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스포티파이와 같은 플랫폼이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개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해도, 때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음에도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예적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손길과 노력을 거쳐 의미를 쌓아 올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과 연결되는 기쁨이야말로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넘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깊이 있는 경험이 아닐까요.
정보의 파도 속, 나를 지키는 주체적인 삶
우리는 정보의 양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알고리즘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 깊숙이 관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생각과 취향을 가꾸어 나가는 여정은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때로는 불편함과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예상치 못한 만남을 즐기며, 자신만의 속도로 정보를 음미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능동적인 자세야말로 알고리즘과 AI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진정으로 충만한 생활을 누리는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