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날것의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은밀한 의무감의 목소리입니다.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진정한 감상은 지식과 훈련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경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압박감은 예술을 온전한 기쁨이 아닌 풀어야 할 숙제처럼 만들었고, 저는 종종 정답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오랜 고민은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저의 시선은 과연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최근 읽은 비앙카 보스커(Bianca Bosker)의 책 <Get the Picture> (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는 미술계의 속살을 파고드는 한 저널리스트의 여정을 통해 제 오랜 화두에 대한 소중한 실마리를 던져주었습니다. 이 글은 그 책과 함께 '빌려온 시선'에서 벗어나 나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감상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1. 길 잃은 시선: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우리가 미술관에서 느끼는 위축감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자가 파고든 미술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정답처럼 보이는 시선을 제시하는 정교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작품의 가치는 종종 작품 자체보다 외부의 권위, 즉 컨텍스트에 의해 매겨집니다.
권위의 좌표가 먼저 주어집니다. "이 작가는 명문 예일대 출신이다", "이 작품은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되었다", "저명한 비평가 A가 극찬했다"와 같은 정보들이 작품을 둘러쌉니다. 시장의 좌표도 강력합니다. "이 작품은 경매에서 수십억에 낙찰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작품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 목격했듯, 이 그럴듯한 외부의 맥락들은 때로 작품이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탄생하는 치열하고 감각적인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허상일 수 있습니다.
이 강력한 외부의 좌표들 속에서 '나'의 감상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은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일 뿐이라고 치부됩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빌려온 시선으로 작품을 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 우러나온 감상이 아니라 전시 서문에 담긴 해석, 비평가의 언어를 내 생각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하는 것 같아 게으르게 느껴졌다." 저자의 고백은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단순히 지식에 기대는 문제를 넘어선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감상 속에 정작 '나'는 텅 비어버린 채, 다른 이의 목소리만 메아리치는 낯선 풍경. 주인을 잃어버린 감상이었습니다.
2. 나의 좌표를 되찾는 여정: 내 안의 목소리와 세상의 아카이브
'빌려온 시선'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거창한 이론 학습이 아닙니다. 모든 외부의 목소리를 잠시 제쳐 두고, 내 안에서 울리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진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첫째, 직관을 '경계'가 아닌 '대화'의 상대로 삼아야 합니다. 미술계의 속삭임은 우리의 직관을 훈련되지 않은 날것의 반응이라며 불신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직관이야말로 예술과 ‘나’가 만나는 가장 순수한 '출발점'입니다. 그 최초의 끌림 혹은 반감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나 자신입니다. 그 목소리를 억누르는 대신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작품 분석을 넘어, '나 자신'이라는 가장 깊고 중요한 맥락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나'와 '문화적 아카이브'의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나만의 세계에 갇히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지요. 저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나 혼자만의 감상에 머물지 않을 수 있을까. 진정한 감상은 '나'라는 개인적 세계가 미술사, 비평과 같은 거대한 '문화적 아카이브'와 조우하며 서로를 비출 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답을 확인하듯 지식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상을 통해 지식을 시험하고, 지식을 통해 나의 감상을 되돌아보는 '대화'의 태도일 겁니다.
그 대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먼저 내 안의 직관과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보는 겁니다. 그러다 문득 "아, 내가 느꼈던 이 어지러움이 바로 입체파가 전통적 원근법을 파괴하며 주었던 시각적 충격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 순간, 문화적 아카이브는 더 이상 암기해야 할 정답지가 아니라, 나의 감각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다정한 해설서가 되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지식이라는 렌즈를 통과하며 더 선명해지고 깊어진 나의 시선은, 이제 작품의 첫인상과는 또 다른 차원의 울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비추며 깊어질 때 감상의 즐거움은 깊어집니다.
3. 감상의 주체를 넘어, 의미의 생산자로
'나'라는 맥락과 '문화적 아카이브'의 건강한 대화는, 감상자를 단순히 감상하는 주체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생산자로 이끕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Icy Gays)라는 컬렉터 부부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여정은 언제나 순수한 끌림이라는 개인적 맥락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끌림을 단단한 토대 삼아 진정한 큐레이팅의 여정이 펼쳐집니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을 '탐색의 지도' 삼아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미술사적 지식을 탐구하며 자신들의 선택을 기존의 문화적 아카이브와 연결합니다. 이 외부 맥락은 그들의 첫 끌림이 단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의 보조 도구'가 되어줍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소장한 작품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기존의 맥락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지하는 신진 작가에게 '주목받는 컬렉터가 선택한 작가'라는 새로운 컨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미래의 누군가에게 새로운 '문화적 아카이브'의 일부가 될 만한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평범한 감상자를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큐레이터'가 됩니다.
결론: 나의 감상에 ‘나’를 되돌려주기
전시장을 거닐며 우리가 던져야 할 궁극적인 질문은 "이 작품의 정답은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나의 감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질문하며 나 자신과 대화해야 합니다.
<Get the Picture>가 보여주듯 진정한 안목이란 더 많은 지식을 암기하는 능력이 아니라, 수많은 외부의 목소리 속에서 온전한 '나'의 목소리를 되찾고, 그 목소리로 작품과 치열하게 대화하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직관은 무시해야 할 미숙한 반응이 아니라 모든 경험이 응축된 진솔한 출발점이며, 미술사적 지식은 그 출발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도이지 따라야 할 명령이 아닙니다. 결국 미술 감상은 작품을 보는 행위를 넘어, 주체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자, 규칙을 배우되 궁극적으로는 그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여정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우리의 안목은 미술사라는 단 하나의 지도에만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첫눈에 외면했던 작품이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나 영화의 한 장면, 강렬했던 개인적 경험을 계기로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놀라운 순간을 기꺼이 환대하게 됩니다. 지식이야말로 유일한 지도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감상 세계는 무한히 확장됩니다. 이제, 당신의 감상에 온전히 ‘당신’을 되돌려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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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 - 빌려온 시선을 넘어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여정
"이 작품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미술관에서 한 번쯤 느껴본 위축감. 비앙카 보스커의 책 <Get the Picture>(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길잡이 삼아, 외부의 권위와 정답에 휘둘리는 '빌려온 시선'에서 벗어나 내 안의 목소리로부터 시작하는 감상의 여정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