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② - 빌려온 시선의 역사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찾아오는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레이놀즈부터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출발점으로 삼은 페이터까지, 감상의 역사를 따라 ‘빌려온 시선’의 뿌리와 나의 좌표를 살펴봅니다.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②

지난 글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이 '빌려온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제 개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고민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로셸 거스타인(Rochelle Gurstein)의 책 ‘Written in Water’는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었는데요, 책장을 넘기며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을 알아보는 눈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아름다움에 개인의 기호를 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자연의 불완전함을 걸러낸 ‘이상적 미’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예술가는 고대 조각이나 라파엘로 같은 전범을 모방하고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가 권한 모방은 겉모습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판단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인간 본성에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그 공통된 바탕에 닿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취미(taste)’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판단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와 같다면 널리 인정받는 작품 앞에서 감동하지 못했을 때, 아직 자신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해석에 기대며 제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음과 겹치는 대목입니다.

감상의 기준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모범은 언제나 옛 거장의 작품에 있을까요? 풍경화가 터너와 그의 옹호자 존 러스킨은 이미 인정받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입니다. 터너의 폭풍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은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난했습니다. 러스킨은 바로 그 혼란이 실제 폭풍 속 자연에 충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보라와 낮게 깔린 구름이 뒤섞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러스킨은 이런 관찰을 근거로 터너를 옹호하며, 존경받던 옛 풍경화도 자연을 얼마나 충실히 표현했는지 다시 따졌습니다. 거장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그림이라 할 수 있는지, 그 판단의 근거를 다시 묻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느낌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연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러스킨이 그림에 담긴 자연의 진실을 따졌다면, 월터 페이터는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서 아름다운 육체뿐 아니라 쾌락의 여신에게 깃든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살피려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앞서, 자신이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흔들리는 아카이브

저는 지난 글에서 ‘문화적 아카이브’와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작품과 해석을 살펴보며, 제 감상을 더 넓은 맥락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페이터가 보티첼리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냈듯, 우리가 참고하려는 작품과 해석의 아카이브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메디치 비너스는 수 세기 동안 ‘이상적 미’의 모범으로 사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티첼리는 후대의 눈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감상은 틀렸고 지금의 감상은 옳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작품을 사랑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은 감동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좋아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역사 속에서 나의 좌표 찾기

오래 사랑받아온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습니다. 배워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공감하고요. 다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감동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묻기에 앞서, 제가 배우려는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느낌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제 안목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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