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 - 빌려온 시선을 넘어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여정
“이 작품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미술관에서 한 번쯤 느껴본 위축감. 비앙카 보스커의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를 길잡이 삼아, 내 감상과 작품을 둘러싼 지식을 함께 살피며 나만의 시선을 찾아가는 여정을 나눕니다.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
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감상에는 지식과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가 느낀 것도 믿기 어려웠고, 어느새 예술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작품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선은 정말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2023년 갤러리 휘슬에서 열린 전시 《근사치》 서문이 떠오릅니다. 박수지 큐레이터가 쓴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이라는 구절인데요.
비앙카 보스커의 『Get the Picture』(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을 이어갈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미술계 안으로 들어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저명한 비평가의 호평, 높은 경매 낙찰가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기대를 만들곤 합니다.
그 기대에 제 감상을 맞추려 할 때가 문제였습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고, 전시 서문과 비평가의 언어를 되짚으면서 정작 제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는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 설명이 작품의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 감상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보스커는 에린 오키프(Erin O’Keefe)의 사진을 판매하던 중 자신이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했다고 돌아봅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할 말은 익혔는데, 정작 작품 자체를 충분히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제 감상인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봅니다.
작품의 배경과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을 눈앞의 작품과 연결하고, 제가 느낀 것과 견주어보는 과정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 나에게서 시작해 작품으로 돌아오기
저는 감상의 순서부터 바꿔보려 합니다. 제 반응을 먼저 살피고, 지식과 견주어본 뒤,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선 제 감각에 충분히 머물러보려 합니다. 작품 앞에서 생긴 끌림이나 반감에는 제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기억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해설을 찾아 읽기 전에, 눈앞의 작품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라는 중요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무엇을 낯설어하는지가 지금의 감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관을 그저 미숙한 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처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가의 다른 작업,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을 찾아 읽습니다. 제가 혼자 보아서는 알기 어려웠던 배경,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을 택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감상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고 해서, 살펴야 할 조건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스커가 앵그르의 미술사적 위치를 몰라도 되고,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쓴 대목에서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작품 앞에서 직접 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그 작품이 예술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미술사와 비평에는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질문하며 쌓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이 문화적 아카이브를 만나면, 처음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역사와 논의를 접하며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 작품을 직접 들여다보며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시험하며 감상도 확장됩니다. 문화적 아카이브는 감상을 대신 결정해주는 정답지가 아니라, 제가 보지 못한 것도 이야기해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배운 것으로 답을 확정하려는 마음을 잠시 놓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감상을 맥락에 맡겼다고 깨달은 보스커도 오키프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바닥 위에는 노란 반원과 가느다란 갈색 막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형태가 놓여 있습니다. 입체물을 찍은 사진인데도 그림처럼 보여, 무엇이 실제 물체이고 무엇이 평면에 그려진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스커는 대학 시절 배웠던 사진의 성질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무엇을 담고 잘라내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키프는 사진이 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는 듯했습니다. 계속 들여다보자 노란 배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작은 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려진 것일까, 빛이 반사된 것일까. 보스커는 이 불확실함 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씁니다.
3. 선택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러가는 시선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작품을 함께 놓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로 알려진 컬렉터 부부, 롭과 에릭의 이야기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기릅니다. 롭은 미술사 책을 읽고 다른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눈여겨보며, 에릭은 직접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러미 올슨의 그림 앞에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에릭은 작품에 강하게 끌렸지만, 롭은 누가 샀고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반응과 기사도 찾아본 뒤, 롭은 구매를 결정한 이유로 기존 컬렉션과의 어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을 보며 기뻐하는 에릭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작품이 자신들이 모아온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함께 살아갈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를 살핀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두 사람이 쌓아온 관심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깁니다.
그들이 컬렉션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롭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것을, 집에 온 이웃들도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온라인에 컬렉션을 공개하고 이웃에게 집을 열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함께 보여줄지를 정하면서, 두 사람은 자기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됩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담겼던 그들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이 됩니다. 수집과 큐레이팅은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며 확장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입니다.
나의 감상에 ‘나’가 있다는 것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늘 일치하진 않습니다.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작품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작품 앞에 더 머물고 싶어지기도 하겠지요.
작품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와 제가 마음을 준 이유를 함께 살피며, 어느 부분에 공감하고 어디에서 생각이 달라졌는지 알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감상은 제 말로 풀어낼 수 있을 테고, 어떤 감상은 다시 찾아가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품을 알아가는 동안, 감상하는 ‘나’도 함께 달라집니다.
2026년 9월,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시 읽으며 단정적인 표현과 반복되는 설명을 다듬고, 책에서 읽은 것과 제 생각을 더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식과 제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은 그 고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던 시선이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그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물체 하나와 그 곁의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아름답게 하는지 생각하다가, 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갔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읽은 전시 서문에는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읽고 나니 그림 속 고독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품 앞에서는 연결하지 못했던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홀로 있어도, 관계 속에」에 썼습니다.
시작은 다른 사람의 감탄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그 그림을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따라 거듭 바라보고 서문을 찾아 읽는 동안, 제게도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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