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장애물이 아닌, 가꾸어야 할 재료로 생각해보세요.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모든 것이 쓰게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잘 다룬다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더 달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Monocle>
옷장을 열어봅니다. 한 철 유행에 휩쓸려 샀다가 몇 번 입지도 못하고 방치된 옷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손이 가고 내 몸에 맞게 익어가는 옷들이 공존합니다.
최근 제 마음을 사로잡은 옷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브랜드 코모리(Comoli)의 '실크 넵(Silk Nep)' 팬츠입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츄리닝 바지 같습니다. 표면에는 보풀(nep)이 거칠게 일어나 있어, 누군가는 "그 돈 주고 왜 그런 헌 옷을 사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옷의 진가는 입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피부에 닿는 실크 특유의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입으면 입을수록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 디자이너가 의도한 이 낡음은, 새것의 뻣뻣함이 줄 수 없는 깊은 편안함과 멋을 선사합니다. 남들의 시선보다 입는 사람의 감각에 집중한,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더해지는 옷입니다.
투자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면 저는 종종 옷장을 떠올립니다. 투자의 세계 역시 옷장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만 금세 질리는 패스트 패션 같은 주식이 있는가 하면, 투박해 보여도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클래식 같은 기업이 있습니다.
그런 클래식을 찾아 헤매던 시절을 함께한 텍스트가 있습니다. 바로 닉 슬립과 콰이스 자카리아가 쓴 <노마드 투자자 서한>입니다. 지난 2년간 카바나(CVNA)에 투자하며 50배의 수익을 거두는 과정은, 얼핏 보기엔 화려한 숫자일지 몰라도 안에서는 의심과 공포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 서한들을 읽으며 중심을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이 글들을 읽어내려갑니다.
담은 순간들에서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저의 투자 여정을 지탱해 주었던 <노마드 투자자 서한> 속 지혜들을 다시 정리해 보려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 '기다림'이라는 럭셔리입니다.
1. 시간이라는 해자 (The Moat of Time)
모노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즉각적 만족(Instant Gratification)의 세대'입니다. 모든 것이 당장 해결되어야 하고, 보상은 즉시 주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조급함은 투자 시장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시계열은 1년에서 분기로, 다시 하루하루로 짧아졌습니다. 모두가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것을 쫓는 이 숨 가쁜 호흡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때를 기다리는 모습은 치열하게 일하지 않는 '게으름'이나 변화에 뒤처진 '무능'으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시간 범위(time horizon)를 늘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방법하에서는 불가능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3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면, 당신은 수많은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하지만 7년이라는 시간 범위를 가진다면, 경쟁자는 확연히 줄어듭니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 단기적 시각 (Short-term) | 장기적 시각 (Long-term) | |
|---|---|---|
| 시간 범위 | 1년 ~ 3년 | 7년 이상 |
| 경쟁 강도 | 매우 치열함 (Red Ocean) | 거의 없음 (Blue Ocean) |
| 투자 성격 | 성과 증명과 타이밍 싸움 | 본질적 가치 창출과 기다림 |
대다수의 투자자는 1년, 아니 다음 분기의 성과에 목숨을 겁니다. "올해 지수(Index)를 이겼는가?"라는 질문에 쫓기며, 당장 오를 것 같은 '핫한' 주식을 찾아 헤맵니다. 이는 매 시즌 바뀌는 유행을 쫓아 패스트 패션을 사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잠깐의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 옷장에는 유행 지난 옷무덤만 남게 됩니다.
노마드는 우리에게 "단기적 시각을 가진 군중들보다 더 멀리, 길게 보는 것만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투자의 질(Quality)'이지 '수익의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듯 5년, 10년이라는 긴 호흡(Time Horizon)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남들이 넘볼 수 없는 '시간의 해자' 안에 머물게 됩니다.
경쟁이 치열한 단거리 트랙에서 벗어나, 아무도 달리지 않는 장거리 트랙으로 들어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경쟁우위입니다.
2. 소음 속에서 고요를 입는 법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투자를 하면서 ‘시장 지수’를 신경 써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운 좋게도 지난 몇 년 간 압도적인 수익을 거두고 있었기에, 지수는 제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를 무너뜨린 건 지수가 아니라 '비교'에서 오는 FOMO였습니다. 제 주식이 숨을 고르는 사이, 옆 동네의 AI와 원전 관련주들이 연일 폭죽을 터뜨리는 것을 보며 평정심을 잃었던 것입니다.
노마드는 말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투자자라도, 1년이나 2년 정도 시장보다(혹은 남들보다) 뒤처지는 시기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고요.
우리는 종종 당장의 등락률로 자신의 실력을 검증하려 듭니다. 하지만 노마드는 선을 긋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투자 의사결정의 질(Quality)'이지, '타이밍(Timing)'이 아닙니다."
단기적인 주가 흐름은 그저 '타이밍(운)'을 보여줄 뿐, 우리가 도착할 '최종 목적지(실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주가가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내 투자 아이디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남들의 주가가 오른다고 해서 그들이 영원히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토아적인 초연함입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질'에 집중했다면, 통제할 수 없는 '시기'는 기꺼이 시장에 맡기겠다"는,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자신감입니다.
3.지루함, 성장의 다른 이름
물론 기다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투자는 은행 적금처럼 매일 꼬박꼬박 이자가 붙는 선형적(Linear)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비선형적(Non-linear)인 곡선을 그립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즉 밥을 지을 때 뜸을 들이는 것과 같은 인고의 시간입니다.
저에게도 뼈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제 주력 종목인 '카바나(CVNA)'가 올여름부터 가을까지 횡보하던 시기였습니다. 기업은 분명 좋아지고 있는데 주가는 몇 달째 박스권이었죠.
저는 그때 그것이 '뜸 들이는 시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밥을 지을 때 맹렬히 타오르던 불을 끄고 뚜껑을 덮어두는 시간. 겉보기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열기도 식은 것 같지만, 솥 안에서는 수분이 쌀알 깊숙이 스며들며 진짜 밥맛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순간 말입니다.
노마드는 말합니다.
"가치 창출은 천천히 느린 속도로 만들어졌을 때 더 오랫동안 지속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고요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시장 저편에서 '오클로(OKLO)'를 비롯한 원전·AI 관련주들이 매일같이 폭등하며 파티를 벌이자, "남들은 다 돈을 버는데, 나만 지루한 주식을 들고 소외되었다"는 FOMO가 저를 덮쳤습니다. 뜸이 채 들지도 않았는데 솥뚜껑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잘 지어지던 밥(카바나)을 팔아치우고, 화려해 보이는 파티장(오클로)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제가 뒤늦게 올라탄 오클로는 폭락하여 큰 손실을 안겨주었고, 제가 버리고 떠난 카바나는 그 직후 비선형적인 폭발을 시작하며 신고가를 경신했습니다.
투자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단지 지금 겉보기에 조용하다는 이유로 뜸이 들고 있는 솥을 제 발로 걷어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기다림,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재료
다시 코모리 팬츠를 입어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아직 이 옷의 진가를 100%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 계절도 보내지 못했거든요. 거울을 보며 "정말 이 낡아 보이는 옷이 시간이 지날수록 멋져질까?" 하고 반신반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그 '의심과 기대 사이의 시간'을 즐겨보려 합니다. 지금 당장은 낯설고 확신이 없더라도, 디자이너의 철학과 좋은 소재의 힘을 믿고 내 몸에 길들여가는 과정을 겪어보려 합니다.
투자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옷에 디자이너의 철학과 좋은 소재가 깃들어 있듯, 기업에는 경영자의 비전과 탁월한 비즈니스 모델이 숨 쉬고 있습니다.
좋은 옷이 몸에 익을 시간이 필요하듯, 경영자의 비전과 비즈니스 모델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그리고 투자자가 그 가치를 온전히 알아보는 데에도 반드시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치는 오직 숙성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완성됩니다.
투자의 시계열을 늘린다는 건, 단순히 주식을 오래 들고 있겠다는 다짐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한 철 입고 버릴 옷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할 클래식을 고르는 안목, 당장의 화려함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본질을 믿고 기다리겠다는 선언입니다.
기다림을 장애물이 아닌, 내 삶을 더 풍요롭게 가꾸어갈 재료로 받아들여 봅니다. 조급함이 틈탈 때마다, 낡을수록 멋스럽게 변할 코모리의 옷을 입으며 되뇌어 보려 합니다.이 옷이 내 몸에 맞춰 익어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진정한 가치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그 깊은 맛을 낸다는 것을요.
당신의 옷장에는, 그리고 당신의 계좌에는 어떤 시간의 결이 쌓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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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라는 럭셔리
입을수록 멋스러워지는 옷과 주식 투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패스트 패션과 단기 테마주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클래식'의 가치를 탐구합니다. 의심과 기대 사이, 그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어떻게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