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리지 않는 수리
상처받기 전으로 돌아가야만 치유일까요. 꿰맨 흔적이 남은 캔버스와 거울 조각을 붙인 나무 가면. 카데르 아티아의 ‘되돌리지 않는 수리’를 통해, 상처 이후의 삶을 회복의 성공과 실패만으로 바라보지 않는 법을 생각해봅니다.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의 개인전에 다녀왔습니다. 전시 제목은 ‘되돌리지 않는 수리’였는데, 이 제목이 참 좋았어요.
되돌리지 않는다는 것
무언가를 고친다고 하면 대개 고장 나기 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 망가졌는지 모르겠네”라는 말은 잘 고쳤다는 칭찬이 되죠. 그런데 이 전시의 제목은 되돌리지 않는데도 수리라고 말합니다.
아티아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교외와 알제리에서 자랐고, 상처와 수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온 작가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캔버스를 절개한 뒤 손으로 다시 꿰맨 작업이 있습니다. 바느질 자국은 감춰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요. 절개하기 전의 천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갈라졌던 자리는 이어져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다가 사람의 상처에도 마음이 갔습니다. 이미 겪은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회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되돌릴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 전시 제목에서 그런 가능성을 느꼈어요.
그 일을 겪은 나에게서
어떤 기억에 다시 마음이 흔들릴 때 “왜 나는 아직도 이럴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아져야 잘 회복한 것 같고, 다시 아프면 그동안의 노력이 소용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기억이 내 삶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일 거예요. 그사이에 마음을 쏟게 된 것이 생기고, 같은 일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여전히 아픈 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애써 살아온 시간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과 그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여전히 원망스럽고,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런 마음까지 다 정리해야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저는 또다시 지금과는 다른 제가 되기를 기다려야 할 겁니다. 수리의 출발점이 지금의 나여도 된다면, 거기에는 아직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함께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상처를 겪은 뒤에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들과 소중한 시간이 생겨도, 그 일을 겪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의 삶을 아끼기 위해 과거의 상처까지 좋은 일로 바꾸지는 않아도 되는 거예요. 지나온 일을 좋은 이야기로 고쳐 쓰지 않은 채로도,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위로가 됐습니다.
앞으로의 얼굴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Mirrors and Masks》 연작이었어요. 아프리카 전통 가면을 본떠 만든 나무 얼굴에 거울 조각을 붙인 작업이에요. 패인 듯한 나무 표면에서는 지나온 시간이 떠오르고, 거울에는 지금 주변의 풍경이 비칩니다. 나무의 모습은 남아 있으면서도 거울에 들어오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얼굴이었어요.

정체성이라는 제 오랜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 내가 겪은 일과 만난 사람들, 지금까지 해온 선택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저 거울에는 아직 비치지 않은 풍경들이 있잖아요. 앞으로 어떤 빛이 들어오고 누가 그 앞에 설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환경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나를 설명할 때도 그런 자리가 들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지나온 이력과 함께, 지금 무엇에 반응하고 앞으로 무엇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지도요.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이미 남아 있는 것들에만 너무 매여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어요.
이 얼굴에서 수리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로 보였습니다. 지나온 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겪은 존재가 이후의 시간을 계속 만들어간다는 것. 나무와 거울이 함께 있는 이 얼굴이 그래서 좋았습니다.
돌본 흔적
거울이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게 했다면, 캔버스의 봉합은 지나온 시간을 다시 보게 합니다. 꿰맨 자국에는 천이 잘렸다는 흔적과 함께 그곳에 손을 대어 이어 붙인 흔적도 남아 있어요. 얼마나 말끔하게 고쳐졌는가에 앞서, 그곳을 돌본 일이 있었다는 것이 보여요.
아픈 시간을 돌아볼 때도 얼마나 아팠는지뿐만 아니라, 아픈 나를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나 나아졌고 무엇을 해냈는지만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무엇을 감당하고 있었는지까지 살피면, 아무것도 못 했다고 여긴 하루가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쓴 시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상처를 준 일에 감사하지 않아도, 그 이후 자신을 돌보려 했던 노력은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 그동안 저와는 거리가 있던 ‘돌봄’이라는 말로 제 시간을 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계속 살아가는 시간
예전에 읽은 『아픈 몸을 살다』가 떠올랐습니다.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 마음을 두고, 계속 회복 중이면서도 원하는 삶을 지금 붙잡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좋았어요. 돌봄이 필요한 지금도 제 삶의 본편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책에는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보던 밤, 통증이 덜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몸 밖의 세계와 연결되었던 경험. 저는 아름다움에 마음이 가 있는 동안 아픔이 차지하는 자리가 달라진 것으로 읽었어요.
제가 끊임없이 무언가에 마음을 주려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프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음악감상과 전시, 독서와 산책으로 관심이 넓어졌어요. 마음 줄 곳을 통해 아픔을 잠시 잊기도 하고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마음 줄 곳을 찾거나 아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얻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잘 쉬고, 감정을 잘 이해하고, 그만큼 나아졌다는 결과까지 내야 한다면 돌봄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요. 쉬었는데도 여전히 힘들 수 있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 쉼이 소용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음악을 듣고 전시를 찾아다니던 시간을 돌봄이라는 말로 다시 봅니다. 그때 좋아했던 것들과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그대로인데, 아픈 저를 위해 애쓰던 모습도 함께 보여요. 돌봄. 저에겐 머나먼 단어였는데, 그 말로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제 삶에 이미 있었습니다.
전시 하나를 만난 후, 지나온 시간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만날 것들도 이렇게 저를 만들어가겠지요. ‘되돌리지 않는 수리’라는 제목을 곁에 두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함께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도 생각해봅니다.
구독하시면 새 글을 메일로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