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모음곡>(이하 만다린)이었습니다. 예습하면서 페트렌코와 베를린필의 조합이라면 역대급 연주가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다린은 미세한 타이밍,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정교한 다이내믹 대비가 개별 악기부터 파트 간 앙상블에 이르는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게 제어되어야 하는 곡입니다. 이 다층적인 정교함이 없다면 그저 혼란스러운 소음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이 지점에서 페트렌코 특유의 집요하리만큼 마이크로한 접근이 빛을 발했습니다. 자칫 소음으로 들릴 수 있는 곡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디테일을 살려내면서도, 오케스트라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엄청난 텐션. 얀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BRSO) 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경험이었습니다.
연주를 듣는 내내 소리가 장면이 되어 눈앞에 그려지고, 몸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청각이 시각과 촉각으로 전이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솔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눈앞에 발레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촉각적 경험이었습니다.
2. 긴밀한 앙상블, 층층이 쌓인 색채
첫 곡 야나체크의 <라치안 춤곡>에서부터 느낌이 왔습니다. 현악 파트의 보잉은 세계 일류 악단에게서도 컨디션이 최상일 때만 볼 수 있는 드문 풍경이었습니다.
8년 전 래틀이 지휘하던 베를린 필은 공부만 잘하고 감정은 메마른 모범생 같았다면, 오늘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은 감정과 표현력이 살아 숨 쉬는 '영혼이 깃든 모범생' 같았습니다.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습니다. 2년 전 내한에서도 느꼈지만(인스타그램 후기), 이번 내한은 더 원숙해졌습니다.
페트렌코의 정교함이 <만다린>에서는 텐션으로 빛을 발했다면, <페트루슈카>에서는 황홀한 색채감을 빚어냈습니다. 특히 초반 사육제 장면의 다채로운 음색은 정교한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8년 전 내한 때도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졸았던 기억밖에 없네요🤣)
올해 플루트 수석으로 베를린필에 새로이 합류한 스테판 라그나르 회스쿨드손(Stefán Ragnar Höskuldsson)의 솔로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노래하는 듯한 따스한 서정이랄까요. 8년 전 같은 곡을 연주했던 파위(Pahud)의 파워풀했던 소리와는 또 다른 결의 감동이었습니다.
3. 감동을 넘어, 삶의 영감으로
좋은 공연은 감동을 넘어 영감을 줍니다. '최고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키릴 페트렌코의 음악에 대한 집요한 헌신. 2년 전 내한 때도 느꼈지만, 온몸으로 지휘하는 페트렌코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예술이었습니다.
또한 오케스트라 자체가 하나의 악기가 된 듯한 정교한 조화. 모든 파트가 훌륭했지만 목관 파트, 특히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조너선 켈리(Jonathan Kelly)의 오보에, 회스쿨드손(Höskuldsson)의 플루트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너무나 쉽게 연주해내는 모습에서 대가의 남다름을 느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이런 양질의 것들을, 최고 수준의 것들을 더 많이 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이렇게 접하는 순간들이야말로 제가 지향해야 할 기준점과 기대치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삶의 큰 기쁨 중 하나는 마음 줄 곳을 찾고, 그것에 탁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도파민보다는 천천히 숙달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은은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언제나 영감을 줍니다. (최근에는 오타니와 야마모토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죠.)
감동을 넘어, 삶의 의미와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은 영감을 준 공연이었습니다. 이 울림을 '담은 순간들'에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려 합니다.
지난 글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이 '빌려온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제 개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고민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로셸 거스타인(Rochelle Gurstein)의 책 ‘Written in Water’는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었는데요, 책장을 넘기며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을 알아보는 눈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아름다움에 개인의 기호를 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자연의 불완전함을 걸러낸 ‘이상적 미’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예술가는 고대 조각이나 라파엘로 같은 전범을 모방하고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가 권한 모방은 겉모습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판단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인간 본성에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그 공통된 바탕에 닿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취미(taste)’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판단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와 같다면 널리 인정받는 작품 앞에서 감동하지 못했을 때, 아직 자신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해석에 기대며 제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음과 겹치는 대목입니다.
감상의 기준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모범은 언제나 옛 거장의 작품에 있을까요? 풍경화가 터너와 그의 옹호자 존 러스킨은 이미 인정받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입니다. 터너의 폭풍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은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난했습니다. 러스킨은 바로 그 혼란이 실제 폭풍 속 자연에 충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보라와 낮게 깔린 구름이 뒤섞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러스킨은 이런 관찰을 근거로 터너를 옹호하며, 존경받던 옛 풍경화도 자연을 얼마나 충실히 표현했는지 다시 따졌습니다. 거장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그림이라 할 수 있는지, 그 판단의 근거를 다시 묻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느낌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연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러스킨이 그림에 담긴 자연의 진실을 따졌다면, 월터 페이터는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서 아름다운 육체뿐 아니라 쾌락의 여신에게 깃든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살피려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앞서, 자신이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흔들리는 아카이브
저는 지난 글에서 ‘문화적 아카이브’와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작품과 해석을 살펴보며, 제 감상을 더 넓은 맥락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페이터가 보티첼리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냈듯, 우리가 참고하려는 작품과 해석의 아카이브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메디치 비너스는 수 세기 동안 ‘이상적 미’의 모범으로 사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티첼리는 후대의 눈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감상은 틀렸고 지금의 감상은 옳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작품을 사랑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은 감동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좋아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역사 속에서 나의 좌표 찾기
오래 사랑받아온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습니다. 배워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공감하고요. 다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감동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묻기에 앞서, 제가 배우려는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느낌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제 안목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감상에는 지식과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가 느낀 것도 믿기 어려웠고, 어느새 예술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작품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선은 정말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2023년 갤러리 휘슬에서 열린 전시 《근사치》 서문이 떠오릅니다. 박수지 큐레이터가 쓴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이라는 구절인데요.
비앙카 보스커의 『Get the Picture』(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을 이어갈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미술계 안으로 들어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저명한 비평가의 호평, 높은 경매 낙찰가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기대를 만들곤 합니다.
그 기대에 제 감상을 맞추려 할 때가 문제였습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고, 전시 서문과 비평가의 언어를 되짚으면서 정작 제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는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 설명이 작품의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 감상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보스커는 에린 오키프(Erin O’Keefe)의 사진을 판매하던 중 자신이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했다고 돌아봅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할 말은 익혔는데, 정작 작품 자체를 충분히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제 감상인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봅니다.
작품의 배경과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을 눈앞의 작품과 연결하고, 제가 느낀 것과 견주어보는 과정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 나에게서 시작해 작품으로 돌아오기
저는 감상의 순서부터 바꿔보려 합니다. 제 반응을 먼저 살피고, 지식과 견주어본 뒤,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선 제 감각에 충분히 머물러보려 합니다. 작품 앞에서 생긴 끌림이나 반감에는 제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기억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해설을 찾아 읽기 전에, 눈앞의 작품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라는 중요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무엇을 낯설어하는지가 지금의 감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관을 그저 미숙한 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처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가의 다른 작업,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을 찾아 읽습니다. 제가 혼자 보아서는 알기 어려웠던 배경,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을 택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감상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고 해서, 살펴야 할 조건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스커가 앵그르의 미술사적 위치를 몰라도 되고,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쓴 대목에서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작품 앞에서 직접 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그 작품이 예술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미술사와 비평에는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질문하며 쌓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이 문화적 아카이브를 만나면, 처음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역사와 논의를 접하며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 작품을 직접 들여다보며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시험하며 감상도 확장됩니다. 문화적 아카이브는 감상을 대신 결정해주는 정답지가 아니라, 제가 보지 못한 것도 이야기해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배운 것으로 답을 확정하려는 마음을 잠시 놓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감상을 맥락에 맡겼다고 깨달은 보스커도 오키프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바닥 위에는 노란 반원과 가느다란 갈색 막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형태가 놓여 있습니다. 입체물을 찍은 사진인데도 그림처럼 보여, 무엇이 실제 물체이고 무엇이 평면에 그려진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스커는 대학 시절 배웠던 사진의 성질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무엇을 담고 잘라내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키프는 사진이 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는 듯했습니다. 계속 들여다보자 노란 배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작은 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려진 것일까, 빛이 반사된 것일까. 보스커는 이 불확실함 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씁니다.
3. 선택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러가는 시선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작품을 함께 놓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로 알려진 컬렉터 부부, 롭과 에릭의 이야기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기릅니다. 롭은 미술사 책을 읽고 다른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눈여겨보며, 에릭은 직접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러미 올슨의 그림 앞에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에릭은 작품에 강하게 끌렸지만, 롭은 누가 샀고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반응과 기사도 찾아본 뒤, 롭은 구매를 결정한 이유로 기존 컬렉션과의 어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을 보며 기뻐하는 에릭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작품이 자신들이 모아온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함께 살아갈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를 살핀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두 사람이 쌓아온 관심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깁니다.
그들이 컬렉션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롭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것을, 집에 온 이웃들도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온라인에 컬렉션을 공개하고 이웃에게 집을 열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함께 보여줄지를 정하면서, 두 사람은 자기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됩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담겼던 그들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이 됩니다. 수집과 큐레이팅은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며 확장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입니다.
나의 감상에 ‘나’가 있다는 것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늘 일치하진 않습니다.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작품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작품 앞에 더 머물고 싶어지기도 하겠지요.
작품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와 제가 마음을 준 이유를 함께 살피며, 어느 부분에 공감하고 어디에서 생각이 달라졌는지 알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감상은 제 말로 풀어낼 수 있을 테고, 어떤 감상은 다시 찾아가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품을 알아가는 동안, 감상하는 ‘나’도 함께 달라집니다.
2026년 9월,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시 읽으며 단정적인 표현과 반복되는 설명을 다듬고, 책에서 읽은 것과 제 생각을 더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식과 제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은 그 고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던 시선이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그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물체 하나와 그 곁의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아름답게 하는지 생각하다가, 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갔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읽은 전시 서문에는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읽고 나니 그림 속 고독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품 앞에서는 연결하지 못했던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홀로 있어도, 관계 속에」에 썼습니다.
시작은 다른 사람의 감탄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그 그림을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따라 거듭 바라보고 서문을 찾아 읽는 동안, 제게도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제 안의 결핍이 성장의 원동력이라 믿어왔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는 끊임없이 저를 채찍질했고,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마음 줄 곳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한 편의 글이 그 단단했던 믿음에 균열을 냈습니다.
그 글은 척박한 땅일지라도, 그곳에서 치열하게 뿌리내려 마침내 꽃을 피워냈다면 그 땅은 더 이상 버려진 황무지가 아니라 소중한 정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장소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낸 충실한 시간이 그 장소를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핍’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 정말 결핍이었을까.
'결핍'이라는 프레임의 함정
처음에는 제가 '결핍이라 여겼던 것'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핍에서 비롯된 과도한 기대는 어김없이 서운함으로 이어졌고, 관계는 위태로워졌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찾은 곳이 예술과 운동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니 더는 상처받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핍을 채워야 한다’는 근본적인 동기가 바뀌지 않으니, 집착은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문제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결핍’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는 세상은, 사람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이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결핍에서 승화로
진정한 사랑은 ‘결핍을 메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호기심’에서 시작할 때 가능했습니다. 결과물의 성패를 따지기보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 미묘한 감각의 변화와 리듬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완벽함에 대한 기대를 버리자 비로소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대표적으로 운동이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을 키우고 싶다는,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목적이 앞섰습니다. 결과에 집착하니 목표 달성이 더딜 때면 자책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 그 자체가 주는 감각, 규칙적인 리듬이 주는 안정감,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작은 성취감 자체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에서 벗어나자, 운동은 비로소 제 삶의 온전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결핍이 승화되는 과정은 때로 한 개인을 넘어 인류의 서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와 결핍을 인류의 미래라는 거대한 사명으로 승화시킨 일론 머스크처럼 말입니다. (월터 아이작슨, 『일론 머스크』)
마음 둘 곳 없던 그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화성을 향한 그의 열정은 어쩌면 새로운 고향을 찾으려는 간절한 꿈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려는 사명감 역시, 세상에 없던 친족을 빚어내려는 외로운 소년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놀이터에서 홀로 상처받았던 소년의 기억이, 트위터라는 이름의 거대한 온라인 놀이터를 직접 소유하고 그곳의 규칙을 새로 쓰려는 어른의 비전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머스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결핍을 승화시킨 관점에서 보자면, 머스크의 사례는 과거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삼는 아름다운 형태의 승화로 다가옵니다.
나의 취향은 나의 눈물값
종종 누군가 저의 취향이 부럽다는 말을 건넬 때, 저는 속으로 ‘제 눈물값이에요’라고 되뇌곤 했습니다. 굳이 부러워할 것 없다는, 취향 필요 없으니 차라리 이 모든 아픔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자조 섞인 항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합니다. 상처가 아물며 더 단단한 살이 돋아나듯, 한때 결핍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것을요. 결핍은 메워야 할 구덩이가 아니라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갈 재료였습니다. 그 재료를 ‘결핍’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채로 바라볼 때는 고통이었지만, ‘나의 고유한 경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상처와 눈물은 이제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저만의 스타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입니다. 누구나 잊지 못할 여름을 하나쯤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독 햇살이 뜨거웠고 모든 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런 계절 말입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바로 그런 여름의 풍경을 스크린에 오롯이 담아냅니다. 1983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나른한 오후와 싱그러운 과일, 그리고 풋풋한 사랑의 설렘과 아픔까지.
하지만 여름은, 그리고 그 여름의 모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더 애틋하고 특별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토록 아름답지만 덧없는 순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여기, 스쳐 가는 순간을 영원에 새기는 과정을 담은 아름다운 영화가 있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찰나의 경험을 어떻게 평생을 지탱할 기억으로 완성하는지를 ‘태도 - 환대 - 애도’라는 세 개의 문을 통해 보여줍니다.
1. 태도: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어떤 순간을 평생의 기억으로 만들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영화는 그 순간의 감정을 섣불리 이름 붙이거나 재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끝나고 열병 같던 시간이 지나간 자리. 영화 말미, 아버지는 아들의 경험을 '첫사랑'이나 '동성애' 처럼 세상이 붙여놓은 이름표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의 감정 세계에서 사회가 붙인 딱지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냅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것은 특정 정체성의 사랑이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온 마음을 다해 이끌리고 그로 인해 기쁨과 고통을 겪는 하나의 순수한 우주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켜내라고 건네는 것은 관계를 한마디로 재단할 어떤 이름표가 아닙니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영화는 이 사려 깊은 태도를 대사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의 영화적 언어로 완성해냅니다. 카메라는 관객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구하는 듯, 좀처럼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서거나 서둘러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걸음 떨어진 채로, 싹트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머뭇거림, 속삭임들을 묵묵히 그리고 오래도록 지켜볼 뿐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영화의 태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환대: 감정이 머물 공간 만들어주기
그렇게 한 인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는 구체적인 환대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감정이 살아남기 위해 안전한 집이 필요하다면, 엘리오의 부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지어줍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섣부른 위로를 건네거나 어색한 침묵으로 상황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 속 아버지는 아들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택합니다.
이별 후 상심에 빠진 아들. 아버지는 소파에서 아들과 마주앉아 아들의 남은 생을 지탱할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랑을 판단하거나 규정하는 대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유대 자체로 먼저 인정해줍니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 한 인간의 감정과 경험 전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이상적인 형태의 환대를 보여줍니다.
“어떤 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낭비냐! ,,, 지금 네 안에는 슬픔이, 고통이 있겠지. 그 감정을 죽이지 마라. 네가 느꼈던 그 기쁨까지도 함께.”
아버지의 이 말은, 엘리오가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감독은 이 따뜻한 선물이 건네지는 순간을, 더없이 따스하고 섬세한 선율로 감싸 안습니다. 아버지의 조언이 나지막이 이어지는 동안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이 흐릅니다. 곡 특유의 부드럽고 동화적인 선율은 아버지의 진중한 말이 아들에게 부드럽게 스며들도록 돕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영화가 끊임없이 경계를 허무는 작품임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독이 '어미 거위'라는 제목의 곡을 '아버지'의 장면에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음악은 부성애와 모성애의 경계를 허물어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는 '완전한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주제와 일관성을 이루는 섬세한 연출입니다.
네가 겪고 있는 감정은 혼자가 아니야
아버지의 말이 엘리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환대였다면, 영화는 예술과 문학을 통해 엘리오의 감정을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하는 또 다른 차원의 환대를 보여줍니다. 엘리오의 감정이 결코 혼자만의 별난 것이 아님을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맥락을 통해 따뜻하게 보여줍니다.
영화가 올리버의 육체를 계속해서 고대 그리스 조각상과 겹쳐 보여주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는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느끼는 육체적 끌림이 부끄럽거나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탐미의 대상이었던 보편적 아름다움의 연장선에 있음을 암시하며 엘리오의 욕망에 보편적 맥락을 부여합니다.
보편적인 맥락을 부여하는 환대는 어머니에게서 더욱 섬세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너 왜 그러니?"라고 직접 묻는 대신, 소설 <헵타메론>을 소리 내어 읽어줍니다.
"말을 하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죽는 것이 나을까요?"
수백 년 전 한 기사의 애타는 질문이 시공간을 건너와, 20세기 소년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가만히 내려앉습니다. 그 순간 엘리오의 사랑은 더 이상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고뇌가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이야기가 될 자격이 있는 유구한 인간 감정의 일부가 됩니다. 엘리오의 감정이 머물 수 있는 보편적인 맥락을 문학을 통해 제공하는, 더없이 사려 깊은 환대입니다.
때로는, 가장 깊은 환대가 그저 아름다운 무대를 마련해주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온전히 작별할 수 있도록 이별 여행을 계획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존중하고 그 이야기가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해주는 깊은 존중의 표현입니다.
3. 애도: 감정을 내 안에 새기기
이런 환대 속에서 엘리오는 상실을 마주할 힘을 얻습니다. 이제 그는 스쳐 가는 순간을 평생의 기억으로 만드는 마지막 문, '애도'의 시간으로 들어섭니다.
우리는 격렬한 감정을 겪고 나면 마음이 닳아 없어질까 두려워지곤 합니다. 한정원 작가가 "몸의 관절이 오래 쓰여 닳듯, 마음도 닳는다"며, "그것들이 서둘러 쓰일까 봐 혹은 슬픔에 다 쓰일까 봐 두려워, 인색하게 굴 때도 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요. 어쩌면 우리 역시 다시는 그만큼의 마음을 내어줄 수 없을까 봐, 다음 사랑을 위해 마음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힐지 모릅니다.
이 보편적인 두려움에 영화 속 아버지는 답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너무 서둘러 치유하려다, 자기 자신의 너무 많은 것을 도려내고 말지. 그래서 서른 즈음엔 마음이 파산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어줄 감정이 점점 줄어들게 된단다. ,,, 우리의 마음과 몸은 오직 한 번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네가 알아채기도 전에 네 마음은 닳아 해어지고. ,,, 지금 네 안에는 슬픔이, 고통이 있겠지. 그 감정을 죽이지 마라. 네가 느꼈던 그 기쁨까지도 함께."
아버지는 마음이 닳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한하기에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닳아 해어질까 두려워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삶이야말로,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파산이며 끔찍한 낭비라고요. 아버지는 우리에게 선택을 제안합니다. 닳아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아파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아끼려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공허해질 것인가.
영화가 말하는 건강한 애도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느끼는 것. 상실의 고통은 그만큼의 기쁨이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그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소중했던 기쁨의 가치까지 부정하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온전히 겪어낼 때 비로소 상실은 단순한 사라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쁨의 순간과 슬픔의 순간이 모두 합쳐져 평생을 지탱할 '아름다운 기억'으로 완성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과정을 보여줍니다.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듣고 엘리오는 벽난로 앞에 주저앉습니다. 카메라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엘리오의 얼굴에 머뭅니다. 엘리오의 얼굴 위로 그해 여름의 모든 풍경이 스쳐 지나갑니다. 설렘, 기쁨, 환희, 그리고 지금의 이 아픔까지. 어떤 감정도 피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을 겪으며, 그 모든 경험을 자신의 내면에 아로새겨 아름다운 기억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쳐 지나간 수많은 여름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나요. 혹시 너무 서둘러 잊으려 하지는 않았나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의 모든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것이라고. 그렇게 온전히 끌어안은 감정이야말로 평생을 지탱할 우리만의 '마음 줄 곳'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상실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그 상처를 안고 나아갈 용기를 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때로 한 편의 영화는 어떤 위로나 조언보다 더 선명한 등불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제게는 '문라이트'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주는 위로의 방식은 조금 특별합니다. 서사를 대사로 나열하기보다 이미지와 사운드, 인물의 시선 같은 영화적인 언어로 내면과 분위기를 조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소년의 충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엄마가 마약에 취해있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 일상적 조명 대신 극단적인 붉은색과 푸른색 조명을 사용하고, 소리를 비현실적으로 왜곡시켜 소년이 겪는 이질감과 혼란을 관객의 피부에 직접 와 닿게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 소년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상처 입은 기억을 안아주며 마침내 자기 긍정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갑니다. 세상이 붙인 꼬리표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영화가 그려내는 그 시선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상실의 흔적, 그리고 갑옷 속의 소년
샤이론의 유년기는 따뜻한 환대의 기억과 함께, 그의 삶을 뒤흔든 두 개의 커다란 상실로 새겨져 있습니다. 아버지 같았던 후안의 소리 없는 부재, 그리고 유일한 친구였던 케빈이 남긴 깊은 상처.
영화는 이 기억들을 검은 화면(샤이론) 위로 점멸하는 '푸른빛'(후안)과 '붉은빛'(케빈)으로 시각화합니다. 이는 영화 포스터가 세 가지 색으로 샤이론의 얼굴을 나누어 보여주듯, 그의 정체성을 형성한 두 개의 거대한 영향을 상징합니다. 후안이 남긴 푸른빛, 케빈이 남긴 붉은빛. 점멸하는 두 빛은 상실의 아픔인 동시에 지울 수 없는 그의 일부가 되었음을, 사라짐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음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내면에 새겨진 흔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샤이론은 단단한 갑옷을 둘러맵니다. 과시적인 금니, 마초적인 몸과 음악으로.
기억 안아주기: 영원한 환대의 등불
하지만 그 갑옷이 샤이론을 영원히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를 옥죄는 상처의 기억 속에는 역설적으로 그를 구원할 환대의 기억 또한 희미한 등불처럼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희미한 등불이 어떻게 다시 그의 길을 밝혔을까요.
수많은 상처가 그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사랑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어른이 된 샤이론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케빈을 만나러 가는 길, 영화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이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닙니다. 또 다른 상처가 될지 모를 만남을 앞두고, 그의 무의식이 소환해 낸 사랑의 원형적 기억. 이 환대의 기억을 등불 삼아 샤이론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편 케빈을 만나러 가기 직전, 샤이론은 또 다른 과거의 그림자와 마주합니다. 망가진 모습으로 아들을 사랑한다며 용서를 구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게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한 그 슬픈 해방감이, 역설적으로 그가 또 다른 상처의 근원인 케빈에게서 어떤 답을 찾고자 나아가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백이라는 환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샤이론은 폭력과 강요에 짓눌립니다. 그러나 그에게 환대를 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침묵으로 공간을 내어주었습니다.
낯선 소년이 마음을 열 때까지 다그치지 않고 따뜻한 식사를 차려주며 묵묵히 기다려 준 테레사, 그리고 소년의 몸과 마음을 받쳐주며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법을 알려준 후안.
그렇게 그의 내면에 각인된 환대의 방식은, 세월이 흘러 가장 극적인 순간에 다시 한번 재현됩니다. 케빈과의 재회.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케빈은 섣부른 말 대신 요리를 하고, 주크박스에서 노래를 틉니다.
바버라 루이스의 'Hello, Stranger'.
“오랜만이야, 낯선 사람. 다시 보니 정말 좋구나.”
노래 가사는 그들의 못다 한 말이 되어 어색한 침묵을 채웁니다. 말보다 더 깊은 눈빛과 음악, 그리고 테레사가 그랬던 것처럼 음식을 내어주는 환대 앞에서 샤이론은 비로소 자신을 둘러온 갑옷을 스스로 내려놓습니다.
스스로 달빛이 되기로 결정하다
세상을 향해 둘렀던 마초적인 갑옷을 벗는 마지막 과정은 자기 자신을 향한 온전한 긍정으로 완성됩니다.
달빛 아래, 상처 입었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포용하는 엔딩. 더 이상 숨겨야 할 연약함이 아닌, 상처받았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나.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해 온 자기 자신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거 후안이 수영을 가르쳐주며 남겼던 한마디의 말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언젠간 네가 누군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걸 누구한테도 정하게 해선 안 돼."
엔딩에서 영화는 바다 앞에 선 어린 리틀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속 앙투안의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두 시선의 결은 다릅니다. 세상의 끝에 내몰린 앙투안의 얼굴에 '원망과 한맺힘'이 서려 있다면, 샤이론의 시선은 ‘자기 자신을 향한 화해’입니다.
내 안의 등불을 닦아보는 시간
한 인간이 물의 기억(수영)과 불의 기억(요리)을 등불 삼아 현재의 환대 속에서 갑옷을 벗고, 마침내 자기 존재를 잃지 않고 긍정하던 그 마지막 시선.
영화는 제게 묻습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사랑과 환대의 기억은 무엇인지. 그동안 과분한 사랑과 환대를 받았음에도, 그 소중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샤이론의 시선은 제 안에 희미하게 담겨 빛나고 있던 등불들을 다시 한번 소중히 닦아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