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이 '빌려온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제 개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고민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로셸 거스타인(Rochelle Gurstein)의 책 ‘Written in Water’는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었는데요, 책장을 넘기며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을 알아보는 눈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아름다움에 개인의 기호를 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자연의 불완전함을 걸러낸 ‘이상적 미’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예술가는 고대 조각이나 라파엘로 같은 전범을 모방하고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가 권한 모방은 겉모습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판단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인간 본성에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그 공통된 바탕에 닿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취미(taste)’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판단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와 같다면 널리 인정받는 작품 앞에서 감동하지 못했을 때, 아직 자신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해석에 기대며 제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음과 겹치는 대목입니다.
감상의 기준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모범은 언제나 옛 거장의 작품에 있을까요? 풍경화가 터너와 그의 옹호자 존 러스킨은 이미 인정받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입니다. 터너의 폭풍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은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난했습니다. 러스킨은 바로 그 혼란이 실제 폭풍 속 자연에 충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보라와 낮게 깔린 구름이 뒤섞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러스킨은 이런 관찰을 근거로 터너를 옹호하며, 존경받던 옛 풍경화도 자연을 얼마나 충실히 표현했는지 다시 따졌습니다. 거장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그림이라 할 수 있는지, 그 판단의 근거를 다시 묻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느낌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연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러스킨이 그림에 담긴 자연의 진실을 따졌다면, 월터 페이터는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서 아름다운 육체뿐 아니라 쾌락의 여신에게 깃든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살피려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앞서, 자신이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흔들리는 아카이브
저는 지난 글에서 ‘문화적 아카이브’와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작품과 해석을 살펴보며, 제 감상을 더 넓은 맥락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페이터가 보티첼리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냈듯, 우리가 참고하려는 작품과 해석의 아카이브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메디치 비너스는 수 세기 동안 ‘이상적 미’의 모범으로 사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티첼리는 후대의 눈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감상은 틀렸고 지금의 감상은 옳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작품을 사랑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은 감동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좋아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역사 속에서 나의 좌표 찾기
오래 사랑받아온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습니다. 배워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공감하고요. 다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감동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묻기에 앞서, 제가 배우려는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느낌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제 안목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감상에는 지식과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가 느낀 것도 믿기 어려웠고, 어느새 예술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작품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선은 정말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2023년 갤러리 휘슬에서 열린 전시 《근사치》 서문이 떠오릅니다. 박수지 큐레이터가 쓴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이라는 구절인데요.
비앙카 보스커의 『Get the Picture』(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을 이어갈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미술계 안으로 들어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저명한 비평가의 호평, 높은 경매 낙찰가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기대를 만들곤 합니다.
그 기대에 제 감상을 맞추려 할 때가 문제였습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고, 전시 서문과 비평가의 언어를 되짚으면서 정작 제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는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 설명이 작품의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 감상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보스커는 에린 오키프(Erin O’Keefe)의 사진을 판매하던 중 자신이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했다고 돌아봅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할 말은 익혔는데, 정작 작품 자체를 충분히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제 감상인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봅니다.
작품의 배경과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을 눈앞의 작품과 연결하고, 제가 느낀 것과 견주어보는 과정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 나에게서 시작해 작품으로 돌아오기
저는 감상의 순서부터 바꿔보려 합니다. 제 반응을 먼저 살피고, 지식과 견주어본 뒤,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선 제 감각에 충분히 머물러보려 합니다. 작품 앞에서 생긴 끌림이나 반감에는 제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기억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해설을 찾아 읽기 전에, 눈앞의 작품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라는 중요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무엇을 낯설어하는지가 지금의 감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관을 그저 미숙한 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처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가의 다른 작업,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을 찾아 읽습니다. 제가 혼자 보아서는 알기 어려웠던 배경,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을 택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감상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고 해서, 살펴야 할 조건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스커가 앵그르의 미술사적 위치를 몰라도 되고,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쓴 대목에서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작품 앞에서 직접 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그 작품이 예술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미술사와 비평에는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질문하며 쌓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이 문화적 아카이브를 만나면, 처음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역사와 논의를 접하며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 작품을 직접 들여다보며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시험하며 감상도 확장됩니다. 문화적 아카이브는 감상을 대신 결정해주는 정답지가 아니라, 제가 보지 못한 것도 이야기해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배운 것으로 답을 확정하려는 마음을 잠시 놓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감상을 맥락에 맡겼다고 깨달은 보스커도 오키프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바닥 위에는 노란 반원과 가느다란 갈색 막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형태가 놓여 있습니다. 입체물을 찍은 사진인데도 그림처럼 보여, 무엇이 실제 물체이고 무엇이 평면에 그려진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스커는 대학 시절 배웠던 사진의 성질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무엇을 담고 잘라내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키프는 사진이 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는 듯했습니다. 계속 들여다보자 노란 배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작은 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려진 것일까, 빛이 반사된 것일까. 보스커는 이 불확실함 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씁니다.
3. 선택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러가는 시선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작품을 함께 놓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로 알려진 컬렉터 부부, 롭과 에릭의 이야기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기릅니다. 롭은 미술사 책을 읽고 다른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눈여겨보며, 에릭은 직접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러미 올슨의 그림 앞에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에릭은 작품에 강하게 끌렸지만, 롭은 누가 샀고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반응과 기사도 찾아본 뒤, 롭은 구매를 결정한 이유로 기존 컬렉션과의 어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을 보며 기뻐하는 에릭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작품이 자신들이 모아온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함께 살아갈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를 살핀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두 사람이 쌓아온 관심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깁니다.
그들이 컬렉션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롭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것을, 집에 온 이웃들도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온라인에 컬렉션을 공개하고 이웃에게 집을 열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함께 보여줄지를 정하면서, 두 사람은 자기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됩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담겼던 그들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이 됩니다. 수집과 큐레이팅은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며 확장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입니다.
나의 감상에 ‘나’가 있다는 것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늘 일치하진 않습니다.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작품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작품 앞에 더 머물고 싶어지기도 하겠지요.
작품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와 제가 마음을 준 이유를 함께 살피며, 어느 부분에 공감하고 어디에서 생각이 달라졌는지 알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감상은 제 말로 풀어낼 수 있을 테고, 어떤 감상은 다시 찾아가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품을 알아가는 동안, 감상하는 ‘나’도 함께 달라집니다.
2026년 9월,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시 읽으며 단정적인 표현과 반복되는 설명을 다듬고, 책에서 읽은 것과 제 생각을 더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식과 제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은 그 고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던 시선이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그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물체 하나와 그 곁의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아름답게 하는지 생각하다가, 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갔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읽은 전시 서문에는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읽고 나니 그림 속 고독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품 앞에서는 연결하지 못했던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홀로 있어도, 관계 속에」에 썼습니다.
시작은 다른 사람의 감탄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그 그림을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따라 거듭 바라보고 서문을 찾아 읽는 동안, 제게도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어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음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가 저에게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다소 무겁고 심오한 주제를 다룰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화는 예상과는 다른 결의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감싸는 독보적인 미감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눈부신 미장센, 감각의 향연
도입부의 음악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영화 내내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강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은 인물들의 감정선과 영화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조율하며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여기에 더하여 비비드하면서도 세련된 색감은 존엄한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섬세하게 배치된 듯한 미장센은 그 자체로 영감을 주었습니다. 색감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할 수 있다니요. 탁월한 미감은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전했습니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져, 영화라는 매체를 향유할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존엄한 죽음, 새로운 서사를 쓰다
영화는 우리에게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암 투병 과정에서 흔히 그려지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투병이라는 기존의 익숙한 서사 대신, 주인공은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기로 결연히 마음먹습니다. 그녀는 다가올 쇠락의 과정을 피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존엄을 지키려 합니다. 그 주체적인 선택이 너무나 멋지게 다가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2024년 3월 타계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네만이 떠올랐습니다. 비교적 건강했지만 스스로 조력사를 선택하며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던. 이는 삶의 마지막 몇 년간 겪게 될지도 모를 고통과 존엄성 상실을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그의 오랜 신념에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죽기 전 파리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삶을 마무리했다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 속 주인공의 여정과 겹쳐 보였습니다.
삶의 정점과 끝: 피크-엔드 룰 (Peak-End Rule)
카네만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주창한 이론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피크-엔드 룰(Peak-End Rule)'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기억하고 판단할 때, 경험의 총 시간이나 평균적인 좋고 나쁨보다는 감정이 가장 고조되었던 순간(Peak)과 맨 마지막 순간(End)의 경험에 의해 전체 경험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즉 아무리 길고 즐거운 여행이었더라도 마지막 날 불쾌한 경험을 했다면 그 여행은 나쁜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힘든 경험이었더라도 절정의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긍정적이었다면 전체를 좋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카네만은 파리에서 가족들과 마법 같은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신중하게 세운 계획을 따랐습니다. 피크-엔드 룰로 보면, 그는 90년 인생의 행복한 결말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가 선택한 '좋은 마지막(Good End)'에서 자신의 이론과 삶을 일치시킨 학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장 나다운 순간에 찍는 마침표
가장 좋은 순간에 마무리 짓는 것은 너무 빨리 그만두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마치 전성기 때 은퇴를 한 야구선수처럼요.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러한 통념이나 아쉬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의 마지막 장을 스스로 결정하며 아름답게 써내려갑니다. 이 용기 있는 선택, 스스로 써 내려간 ‘나만의 서사’가 어딘가 낯설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철학적인 질문과 선택을 너무나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뒷받침합니다. 삶의 빛나는 순간들을 담아내는 비비드한 색감,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정교한 구도, 마지막 순간의 아름다움을 함께하는 음악까지. 영화의 미장센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피크-엔드 룰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젊은 나에게는 아직 써야 할 마음이 남아있다
"나란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어"라는 주인공의 대사도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유한성을 직시하게 하는 강렬한 순간이었어요. 언젠가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겠지요. 언제까지 지금처럼 뜨겁게 무언가에 마음을 줄 수 있을까요. 써야 할 마음이 남아있을 때,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더 많이 경험하고 더 깊이 느끼며 순간들을 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가닿기까지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앤드루 헤이(Andrew Haigh) 감독의 <All of Us Strangers>가 제게는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했지만 엔딩 장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랜 고독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터져나가는 듯한 장면과 그 위로 흐르던 'The Power of Love'의 선율이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 강렬한 카타르시스의 순간 이후, 영화는 비로소 제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긴 여운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All of Us Strangers> 공식 포스터
1. 소리, 고독의 공기를 조각하다
이 영화의 공기는 소리로 조각됩니다. 주인공 아담의 깊은 고독과 단절감은 서늘함과 적막함을 불러일으키는 사운드를 통해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텅 빈 아파트의 울림, 도시의 희미한 소음, 그 모든 것이 그의 내면 풍경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침묵과 불안의 정서는, 엔딩 장면에서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The Power of Love'가 울려 퍼지며 비로소 해소됩니다. 마치 오랜 외로움과 슬픔이 그 음악 속에서 별빛으로 찬란하게 승화하는 듯한 그 순간, 음악과 장면이 만들어내는 카타르시스는 응축되었던 감정들을 터뜨리며 위안을 주었습니다.
2. 애도, 유예된 슬픔을 건너는 시간
영화의 중심에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오랫동안 외면해 온 ‘유예된 슬픔’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를 계속해서 침범하는 과거의 기억과 상실감은, 우리 안의 유예된 슬픔이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찾아와 우리를 흔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슬픔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마주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인스타그램) 아담이 기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과거의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는, 어쩌면 그가 평생 외면해왔던 슬픔을 마침내 마주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절실하고도 불가피한 여정처럼 보였습니다.
3. 연결의 갈망, 기억 속 공동체와 현실의 온기 사이에서
저는 아담이 과거의 인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고립된 현실 속에서 기억과 환상을 통해 스스로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치유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현실의 연결이 부재할 때, 때로는 그렇게 내면에서 구축한 관계는 실재하는 관계만큼이나 우리에게 강력한 위안과 힘을 줄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저 또한 heritage와의 소통을 통해,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저 자신을 더 큰 보편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며 위안과 안정감을 얻곤 합니다(인스타그램). 그런 연결은 분명 현재를 살아가는 중요한 자양분이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heritage와의 소통에서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교감이 부재한 만남이기 때문일까요. 그렇기에 더욱 간절히 현실 세계에서의 연결, 서로 마주보며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취향 공동체'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인스타그램1, 인스타그램2).
<All of Us Strangers>의 엔딩 장면은 이 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관계만이 연결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오히려 서로의 깊은 외로움과 아픔을 알아보고 기꺼이 함께 머무르는 '공유된 취약성' 속에 강렬한 연결과 위안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어쩌면 가장 깊은 연결은 바로 그 서로의 취약함을 보듬어주는 순간에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무리하며
<All of Us Strangers>는 명확한 답을 내리는 대신, 기억과 현실, 고독과 연결이라는 주제를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로 펼쳐 보이며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특히 과거와의 관계 맺음, 상상된 연결의 힘, 그리고 현실적 교감에 대한 갈망 등 영화가 이 복잡한 감정들을 탐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곱씹으며 제 안의 풍경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 시간, 제가 '담은 순간들'에 기록하고 싶었던 풍경입니다.
황현산 선생님의 위 문장은 제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방황하던 대학시절, 선생님의 저서 <밤이 선생이다>를 읽으며 이 문장을 마주하고 마음 줄 곳을 찾았으니까요. 그 후로 삶의 리듬을 잃을 때마다, 저는 음악 속으로 도피하듯 찾아들었습니다. 음악은 제 마음을 다잡아주는 소중한 위안이 되어주었죠.
하지만 음악이라는 '마음 줄 곳'에 기대면서 때로는 취약해지기도 했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사라지고 마는 시간예술로서의 음악의 본질에 깊은 슬픔을 느끼기도 했죠. 돌이켜보면 이런 슬픔은 다른 마음 줄 곳 없이 오직 음악에만 의존했기에 생겨난 집착과 취약함이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만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은 때로 저를 더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클래식과 거리두기'를 다짐하기도 했었지요.
취약했던 20대를 떠나보내며 다짐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집착하기보다, 다양한 '마음 줄 곳'들을 발견하고 가꾸며 살아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며 저는 황현산 선생님의 경구를 조금 다르게 품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음악처럼 흐르는' 것은 자유롭고 아름답지만, '정신에 음악만 흐르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일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다양한 마음 줄 곳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담은 순간들'의 첫 글로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고민하다, 2023년 1월에 개인 SNS에 기록했던 글을 꺼내왔습니다. '마음 줄 곳'이라는, 이곳의 시작점이 된 고민과 다짐이 담겨 있어 첫 글로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여 전에 작성되었지만, 그 고민과 지향점은 지금의 '담은 순간들'과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