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모음곡>(이하 만다린)이었습니다. 예습하면서 페트렌코와 베를린필의 조합이라면 역대급 연주가 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다린은 미세한 타이밍,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정교한 다이내믹 대비가 개별 악기부터 파트 간 앙상블에 이르는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게 제어되어야 하는 곡입니다. 이 다층적인 정교함이 없다면 그저 혼란스러운 소음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이 지점에서 페트렌코 특유의 집요하리만큼 마이크로한 접근이 빛을 발했습니다. 자칫 소음으로 들릴 수 있는 곡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디테일을 살려내면서도, 오케스트라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엄청난 텐션. 얀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BRSO) 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경험이었습니다.
연주를 듣는 내내 소리가 장면이 되어 눈앞에 그려지고, 몸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청각이 시각과 촉각으로 전이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솔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눈앞에 발레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촉각적 경험이었습니다.
2. 긴밀한 앙상블, 층층이 쌓인 색채
첫 곡 야나체크의 <라치안 춤곡>에서부터 느낌이 왔습니다. 현악 파트의 보잉은 세계 일류 악단에게서도 컨디션이 최상일 때만 볼 수 있는 드문 풍경이었습니다.
8년 전 래틀이 지휘하던 베를린 필은 공부만 잘하고 감정은 메마른 모범생 같았다면, 오늘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은 감정과 표현력이 살아 숨 쉬는 '영혼이 깃든 모범생' 같았습니다. 오케스트라가 거대한 하나의 악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습니다. 2년 전 내한에서도 느꼈지만(인스타그램 후기), 이번 내한은 더 원숙해졌습니다.
페트렌코의 정교함이 <만다린>에서는 텐션으로 빛을 발했다면, <페트루슈카>에서는 황홀한 색채감을 빚어냈습니다. 특히 초반 사육제 장면의 다채로운 음색은 정교한 태피스트리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8년 전 내한 때도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졸았던 기억밖에 없네요🤣)
올해 플루트 수석으로 베를린필에 새로이 합류한 스테판 라그나르 회스쿨드손(Stefán Ragnar Höskuldsson)의 솔로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노래하는 듯한 따스한 서정이랄까요. 8년 전 같은 곡을 연주했던 파위(Pahud)의 파워풀했던 소리와는 또 다른 결의 감동이었습니다.
3. 감동을 넘어, 삶의 영감으로
좋은 공연은 감동을 넘어 영감을 줍니다. '최고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키릴 페트렌코의 음악에 대한 집요한 헌신. 2년 전 내한 때도 느꼈지만, 온몸으로 지휘하는 페트렌코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예술이었습니다.
또한 오케스트라 자체가 하나의 악기가 된 듯한 정교한 조화. 모든 파트가 훌륭했지만 목관 파트, 특히 안드라슈 골롭(Andraž Golob)의 클라리넷, 조너선 켈리(Jonathan Kelly)의 오보에, 회스쿨드손(Höskuldsson)의 플루트에서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너무나 쉽게 연주해내는 모습에서 대가의 남다름을 느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이런 양질의 것들을, 최고 수준의 것들을 더 많이 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이렇게 접하는 순간들이야말로 제가 지향해야 할 기준점과 기대치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삶의 큰 기쁨 중 하나는 마음 줄 곳을 찾고, 그것에 탁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도파민보다는 천천히 숙달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은은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언제나 영감을 줍니다. (최근에는 오타니와 야마모토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죠.)
감동을 넘어, 삶의 의미와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은 영감을 준 공연이었습니다. 이 울림을 '담은 순간들'에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려 합니다.
지난 글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이 '빌려온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제 개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고민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로셸 거스타인(Rochelle Gurstein)의 책 ‘Written in Water’는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었는데요, 책장을 넘기며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을 알아보는 눈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아름다움에 개인의 기호를 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자연의 불완전함을 걸러낸 ‘이상적 미’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예술가는 고대 조각이나 라파엘로 같은 전범을 모방하고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가 권한 모방은 겉모습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판단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인간 본성에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그 공통된 바탕에 닿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취미(taste)’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판단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와 같다면 널리 인정받는 작품 앞에서 감동하지 못했을 때, 아직 자신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해석에 기대며 제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음과 겹치는 대목입니다.
감상의 기준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모범은 언제나 옛 거장의 작품에 있을까요? 풍경화가 터너와 그의 옹호자 존 러스킨은 이미 인정받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입니다. 터너의 폭풍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은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난했습니다. 러스킨은 바로 그 혼란이 실제 폭풍 속 자연에 충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보라와 낮게 깔린 구름이 뒤섞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러스킨은 이런 관찰을 근거로 터너를 옹호하며, 존경받던 옛 풍경화도 자연을 얼마나 충실히 표현했는지 다시 따졌습니다. 거장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그림이라 할 수 있는지, 그 판단의 근거를 다시 묻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느낌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연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러스킨이 그림에 담긴 자연의 진실을 따졌다면, 월터 페이터는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서 아름다운 육체뿐 아니라 쾌락의 여신에게 깃든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살피려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앞서, 자신이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흔들리는 아카이브
저는 지난 글에서 ‘문화적 아카이브’와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작품과 해석을 살펴보며, 제 감상을 더 넓은 맥락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페이터가 보티첼리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냈듯, 우리가 참고하려는 작품과 해석의 아카이브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메디치 비너스는 수 세기 동안 ‘이상적 미’의 모범으로 사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티첼리는 후대의 눈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감상은 틀렸고 지금의 감상은 옳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작품을 사랑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은 감동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좋아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역사 속에서 나의 좌표 찾기
오래 사랑받아온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습니다. 배워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공감하고요. 다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감동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묻기에 앞서, 제가 배우려는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느낌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제 안목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감상에는 지식과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가 느낀 것도 믿기 어려웠고, 어느새 예술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작품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선은 정말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2023년 갤러리 휘슬에서 열린 전시 《근사치》 서문이 떠오릅니다. 박수지 큐레이터가 쓴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이라는 구절인데요.
비앙카 보스커의 『Get the Picture』(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을 이어갈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미술계 안으로 들어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저명한 비평가의 호평, 높은 경매 낙찰가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기대를 만들곤 합니다.
그 기대에 제 감상을 맞추려 할 때가 문제였습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고, 전시 서문과 비평가의 언어를 되짚으면서 정작 제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는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 설명이 작품의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 감상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보스커는 에린 오키프(Erin O’Keefe)의 사진을 판매하던 중 자신이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했다고 돌아봅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할 말은 익혔는데, 정작 작품 자체를 충분히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제 감상인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봅니다.
작품의 배경과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을 눈앞의 작품과 연결하고, 제가 느낀 것과 견주어보는 과정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 나에게서 시작해 작품으로 돌아오기
저는 감상의 순서부터 바꿔보려 합니다. 제 반응을 먼저 살피고, 지식과 견주어본 뒤,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선 제 감각에 충분히 머물러보려 합니다. 작품 앞에서 생긴 끌림이나 반감에는 제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기억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해설을 찾아 읽기 전에, 눈앞의 작품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라는 중요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무엇을 낯설어하는지가 지금의 감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관을 그저 미숙한 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처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가의 다른 작업,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을 찾아 읽습니다. 제가 혼자 보아서는 알기 어려웠던 배경,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을 택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감상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고 해서, 살펴야 할 조건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스커가 앵그르의 미술사적 위치를 몰라도 되고,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쓴 대목에서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작품 앞에서 직접 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그 작품이 예술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미술사와 비평에는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질문하며 쌓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이 문화적 아카이브를 만나면, 처음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역사와 논의를 접하며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 작품을 직접 들여다보며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시험하며 감상도 확장됩니다. 문화적 아카이브는 감상을 대신 결정해주는 정답지가 아니라, 제가 보지 못한 것도 이야기해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배운 것으로 답을 확정하려는 마음을 잠시 놓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감상을 맥락에 맡겼다고 깨달은 보스커도 오키프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바닥 위에는 노란 반원과 가느다란 갈색 막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형태가 놓여 있습니다. 입체물을 찍은 사진인데도 그림처럼 보여, 무엇이 실제 물체이고 무엇이 평면에 그려진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스커는 대학 시절 배웠던 사진의 성질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무엇을 담고 잘라내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키프는 사진이 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는 듯했습니다. 계속 들여다보자 노란 배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작은 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려진 것일까, 빛이 반사된 것일까. 보스커는 이 불확실함 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씁니다.
3. 선택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러가는 시선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작품을 함께 놓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로 알려진 컬렉터 부부, 롭과 에릭의 이야기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기릅니다. 롭은 미술사 책을 읽고 다른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눈여겨보며, 에릭은 직접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러미 올슨의 그림 앞에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에릭은 작품에 강하게 끌렸지만, 롭은 누가 샀고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반응과 기사도 찾아본 뒤, 롭은 구매를 결정한 이유로 기존 컬렉션과의 어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을 보며 기뻐하는 에릭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작품이 자신들이 모아온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함께 살아갈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를 살핀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두 사람이 쌓아온 관심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깁니다.
그들이 컬렉션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롭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것을, 집에 온 이웃들도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온라인에 컬렉션을 공개하고 이웃에게 집을 열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함께 보여줄지를 정하면서, 두 사람은 자기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됩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담겼던 그들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이 됩니다. 수집과 큐레이팅은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며 확장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입니다.
나의 감상에 ‘나’가 있다는 것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늘 일치하진 않습니다.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작품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작품 앞에 더 머물고 싶어지기도 하겠지요.
작품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와 제가 마음을 준 이유를 함께 살피며, 어느 부분에 공감하고 어디에서 생각이 달라졌는지 알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감상은 제 말로 풀어낼 수 있을 테고, 어떤 감상은 다시 찾아가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품을 알아가는 동안, 감상하는 ‘나’도 함께 달라집니다.
2026년 9월,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시 읽으며 단정적인 표현과 반복되는 설명을 다듬고, 책에서 읽은 것과 제 생각을 더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식과 제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은 그 고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던 시선이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그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물체 하나와 그 곁의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아름답게 하는지 생각하다가, 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갔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읽은 전시 서문에는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읽고 나니 그림 속 고독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품 앞에서는 연결하지 못했던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홀로 있어도, 관계 속에」에 썼습니다.
시작은 다른 사람의 감탄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그 그림을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따라 거듭 바라보고 서문을 찾아 읽는 동안, 제게도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정보의 양이 질을 압도하는 시대, 인공지능(AI)이 생성하는 방대한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을까요? AI는 대개 최고의 자료보다는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를 우선시하며, 방대한 빅데이터를 학습시킨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그럴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루지 못한 채 피상적인 답변을 내놓곤 합니다. 그 '그럴듯함'은 때로 더 큰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안목은 단순히 많은 데이터를 접하는 것만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꾸준히 '양질의 것들'을 의식적으로 접하고, 깊이 있게 소화하는 과정을 통해 연마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안목'을 기르고,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AI와 빅데이터의 그럴듯함, 그 이면의 함정
인공지능은 기존의 널리 알려진 방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요약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활용하는 정보의 '질'까지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질의 자료보다는 온라인상에서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자료를 우선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제되고 검증된 내용을 담고 있는 유료 구독이 필요하거나 특정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고급 정보보다는, 대중적인 뉴스 기사나 블로그 게시물처럼 즉각적으로 확보 가능한 출처를 참고하는 것이죠. 이는 결과적으로 정보의 편향이나 피상적인 분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진정한 통찰과는 거리가 먼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빅데이터'에 대한 맹신 역시 경계해야 할 지점입니다.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질 높은 분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부동산 빅데이터를 투입하여 분석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결과물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의 복잡성과 미묘한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된 내용이 더 큰 오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함마저 들었습니다. 그럴듯함에 속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진짜'를 알아보는 힘: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
그렇다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해야 그럴듯함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은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exposure)'에 있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접하는 것을 넘어,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만나느냐가 우리의 감각과 지성을 단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각이나 지성이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상시로 노출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자극을 줍니다. 그러나 자극은 다양할수록 좋겠지요. 독서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시, 답사, 강연에 참여하는 일, 그리고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양질의 자극 속에 자신을 놓아두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목은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꾸준히 양질의 자극을 통해 단련하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양질의 경험을 찾아 나서고 다양한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주체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알고리즘의 유혹: 보이지 않는 손에 흔들리는 선택
하지만 이렇게 의식적으로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자신을 노출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 알고리즘 때문입니다. SNS 피드, 쇼핑몰의 추천 상품,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알고리즘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알고리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고, 결과적으로 취향의 단순화·몰개성화·획일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한 기사는 이러한 '알고리즘 불안(Algorithmic Anxiety)' 현상을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을 갖기 전에 원하는 것을 예측하고 추천합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원하도록 교묘하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홍수 속 나만의 안식처: 양질의 큐레이션과 종이 잡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고리즘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양질의 정보를 선택하고, 소셜 미디어 피드 바깥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탐구할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양질의 큐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데 있습니다.편집자의 깊이 있는 안목과 철학이 담긴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제공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자극과 깊이 있는 관점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양질의 큐레이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잡지', 특히 '종이 잡지'입니다.
종이 잡지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콘텐츠와 우연히 마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온라인 환경에서는 자신의 관심사를 벗어나는 정보를 만나기 어렵지만, 종이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주제나 이미지와 연이 닿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지금은 검색어조차 떠올리기 어려운 머나먼 과거의 콘텐츠나 분위기를 접하는 데에는 종이 잡지만큼 좋은 매체도 드뭅니다. 저 역시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을 때 종이 잡지를 많이 활용하곤 합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죽 훑어보다가 아이디어나 작업의 방향과 연결될 만한 이미지를 발견하면 스크랩하여 아이디어 보드를 만들곤 했는데요, 이러한 과정 자체가 알고리즘의 추천과는 다른 즐거움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시대의 거울, 문화의 기록: 한 시대를 대표한 잡지의 힘
종이 잡지가 지닌 이러한 발견의 즐거움과 자극은, 잡지가 한 시대의 문화와 지성을 깊이 있게 담아낸 '양질의 큐레이션'의 정수일 때 더욱 커집니다. 저는 2년 전 주말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 GQ 국내판을 정주행했는데요, '종이 잡지'를 주제로 다룬 잡지(어반라이크 34호)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GQ 초기판에 보낸 뜨거운 찬사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패션을 비롯, 문화 전반에 걸친 강렬한 콘텐츠로 대한민국 잡지 저널리즘의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을 기록했다”
"GQ 초기 에디션, 창간호부터 2~3년 정도를 좋아한다. 당시 GQ가 쏟아냈던 콘텐츠는 그야말로 폭격이었다. 당시 에디터들(이충걸, 문일완, 송원석, 정석헌, 장우철)이 썼던 기사는 지금 봐도 훌륭하다. 도발적인 아젠다를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같은 사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매체였다. 잡지가 뭘 해야 하는지, 잡지의 갈 길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그 시절의 GQ를 읽으며 이 코멘트들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잡지가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였던 2000년대 초반, GQ는 주제 선정·필진의 역량· 섭외력 등 모든 면에서 그야말로 끝판왕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잡지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 시대적 소명은 다했을지언정, 그 정신성은 여전히 영원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양질의큐레이션이 담긴 종이 매체를 통해, 평소 제 관심 분야가 아니었거나 온라인이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깊이 있는 콘텐츠들을 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추후 담은순간들에 과거 잡지에서 받은 영감도 다룰 예정입니다.)
오래된 미래: 낡은 잡지에서 발견하는 시간의 지혜
발행된 지 시간이 꽤 흐른 잡지에서는 현재의 일회성 리뷰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독특한 관점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최신 정보가 아니라는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시대의 고민과 지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이 너무나 큽니다.
10년도 더 된 '매거진 B' 에이솝 편(2013년 발행, 당시 브랜드명은 이솝이 아니라 '에이솝'이었습니다!)을 다시 펼쳐보며,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가 된 이솝의 초기 철학과 당시의 시대상을 느끼며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습니다. 또 5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모든 잡지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뿌리 깊은 나무'를 들춰보며 이 시대에 느끼기 힘든 정신성과 깊이에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잡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잘 보존된 '타임캡슐'로서, 현재의 획일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창을 열어줍니다.
동시대를 보는 눈: 동시대 잡지의 역할과 가치
과거의 잡지들이 시간의 깊이를 통해 빛나는 통찰을 제공한다면, 동시대와 발맞추며 현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곁의 양질의 잡지들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과거의 지혜와 동시대의 흐름이 균형 있게 만날 때 비로소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있는 시각과 신뢰할 만한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는 동시대의 잡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꾸준히 보아야 합니다. (저는 정밀한 팩트에 기반하여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국제 정세를 짚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비즈니스·문화·디자인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을 제시하는 '모노클(Monocle)'을 꾸준히 구독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안목 있는 편집자의 철학이 담긴 양질의 큐레이션을 꾸준히 접하는 습관은, 단편적인 정보의 파편을 넘어 세상을 읽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구축하고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만의 리듬 찾기: 디지털을 넘어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으로
의식적으로 양질의 잡지를 찾아 읽는 행위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정보 소비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적 경험'의 가치로 이끌기도 합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잔카를로 발레(Giancarlo Valle)는 프로젝트에서 실제가 축소된 모형을 중요하게 활용하는데요, '모노클(Monocle)'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접근이 "인터넷 알고리즘에 대한 우리 스튜디오의 해독제"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었고 모두가 같은 것을 봅니다.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analogue algorithm)을 만들지 않는 한 그 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디지털 콘텐츠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은 의도적으로 다른 리듬과 질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줍니다. 목적 없이 산책하며 마음 가는 대로 향하기, 목적 없이 서점을 거닐며 우연히 발견한 책을 들춰보는 것, 하루 중 특정 시간만이라도 의도적으로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주변을 관찰하거나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날로그적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나 옥스포드 영어 사전 같은 전통적인 레퍼런스를 여전히 활용하는데요,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자료가 주는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정보에 즉시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깊이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컴퓨터 파일이 아닌 손으로 직접 노트에 정리하는 그녀의 오랜 습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처럼 그녀에게 물리적 실체가 있는 책과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디지털의 무한한 접근성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생산성과 사유의 깊이를 가져다주며,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정보를 체화하는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의 좋은 예입니다.
우연한 발견과 '공예적 즐거움'
제니퍼 이건이 언급한 물리적 매체와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은, 종이 매체가 선사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의 신문이나 잡지에는 편집자의 고뇌와 안목이 담긴 야심 찬 기획이나 실력 있는 필자의 깊이 있는 칼럼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독자들은 설령 그 기사를 읽으려고 산 것이 아닐지라도, 이왕 샀으니 아까워서라도 한번은 읽게 되고, 예상외로 새로운 영감을 얻어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예상 밖의 콘텐츠 소비'는 종종 효율성과 '가성비'라는 잣대에 밀려 무용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우연한 만남과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과정 속에 창의성과 다채로운 사유가 싹트는 토양이 마련됩니다.
종이 매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생각을 메모하는 그 모든 아날로그적 행위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며, 여기에는 디지털이 제공하기 어려운 '공예적 즐거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선택하고, 관계 맺는 주체적인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스포티파이와 같은 플랫폼이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개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해도, 때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음에도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예적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손길과 노력을 거쳐 의미를 쌓아 올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과 연결되는 기쁨이야말로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넘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깊이 있는 경험이 아닐까요.
정보의 파도 속, 나를 지키는 주체적인 삶
우리는 정보의 양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알고리즘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 깊숙이 관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생각과 취향을 가꾸어 나가는 여정은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때로는 불편함과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예상치 못한 만남을 즐기며, 자신만의 속도로 정보를 음미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능동적인 자세야말로 알고리즘과 AI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진정으로 충만한 생활을 누리는 길일 것입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많은 부분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달려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블런의 저서 ‘유한계급론’을 읽다가 ‘과시적 여가’라는 개념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특정 가치를 위해 여가 시간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제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사회적 맥락과는 결이 다르지만, 여가 시간을 어떤 가치를 담아 채워나가는지가 우리 삶의 질과 만족도, 나아가 내면의 성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의미 있는 채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자유 속에 찾아오는 혼란
더 많은 여가 시간이 주어질수록 더 큰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주말 혹은 긴 연휴를 앞두고 ‘잘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시간을 흘려보내곤 합니다.
"퇴근하고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저의 경우 아침에는 부지런히 운동을 하지만, 막상 퇴근 후에는 딱히 정해진 활동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능동적으로 선택한 시간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의 소극적인 시간이라면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런 시간이 한두 번 일시적인 것을 넘어 습관처럼 굳어져 퇴근 후 의미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일상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나를 만나고 삶의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할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에게서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성장의 씨앗들이 얼마나 많을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가에도 때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여가에도 때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한계급론’에서 언급된 유한계급 신사들은 자신의 “한가한 삶을 고되게 갈고닦음으로써” 과시적 여가에 어울리게 생활하는 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이 여가를 통한 사회적 과시에 있었다면, 제가 여가를 통해 추구하는 바는 삶의 의미를 찾고 내면을 채워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은, 어떤 목적이든 가치 있는 여가를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여가 시간을 어떻게 조각해 나가는가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향유하며 삶을 주체적으로 가꾸어가는 능동적인 시간 활용의 문제입니다. 적극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조각’하려는 의지와 실천은 여가를 넘어, 우리가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지표입니다.
시간으로 숙성되는 진정한 럭셔리
의식적인 노력을 들여 가꾼 여가 시간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우리 안에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소중한 자양분이 됩니다. 그렇게 한 켜 한 켜 쌓인 시간과 경험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럭셔리 – 넓고 깊은 안목 – 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럭셔리는 값비싼 물건이나 화려한 경험 너머, 오랜 시간 세심한 시선으로 순간을 포착하고 새김으로써 깊어지는 안목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내면의 자산들은 결코 단기간에 얻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연마하고 가꾸는 과정 속에서 생겨납니다.
결국 여가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진정으로 ‘마음 줄 곳’을 찾고,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가는 창조적인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잘 보낸 여가는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우리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럭셔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담은 순간들'에서는 제가 마음을 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울림을 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거나 절판되어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양질의 책들을 읽고 그 안의 지혜를 탐색하는 두 번째 시리즈입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다룰 책 <The Luxury Strategy>는 럭셔리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고유한 철학과 전략을 가진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럭셔리라는 개념을 통해 제 삶의 가치관과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럭셔리가 삶의 태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담은 순간들'에 담아보려 합니다.
제가 럭셔리에 마음을 주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헤리티지(heritage), 그러니까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해 내려오는 유산에 깊은 애정을 느껴왔습니다. 오래된 것들에 깃든 시간의 흔적과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영감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헤리티지에 특히나 애정과 열정을 갖고 해석하고 활용하는 존재가 '럭셔리 브랜드'였습니다.
저는 단순히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삶의 가치와 태도로서의 '럭셔리'를 지향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장 노엘 캐퍼러와 뱅상 바스티앙이 쓴 <The Luxury Strategy>를 만났습니다. 책에서 다루는 럭셔리의 다양한 속성들 – 고유한 정체성, 시간과 여유의 가치, 기능을 넘어선 꿈과 감성,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 전통과 동시대성의 조화, 구별 짓기, 희소성 등 – 은 앞으로 '담은 순간들'을 통해 하나씩 풀어내고 싶은 소중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고민하며 숙성시킨 생각들을 앞으로 꾸준히 글로 발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그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문장,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 중 하나가 오늘 나눌 이야기입니다.
"럭셔리는 비교급이 아니라 최상급이다.” (Luxury is superlative, not comparative)
오늘은 이 문장을 실마리 삼아, 럭셔리가 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지 그 이유를 '정체성', '기준', 그리고 '전통·유산·역사에 대한 존중'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1. 럭셔리의 정체성: 비교를 거부하는 고유함
럭셔리 브랜드는 자신을 다른 브랜드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브랜드들이 타 브랜드와의 경쟁 속에서 자신의 우위를 찾고 차별점을 부각하려 애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럭셔리는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에만 집중할 뿐, 경쟁자를 의식하거나 비교 우위를 점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유한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저는 '꿈'과 '단단한 중심'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떠올렸습니다.
럭셔리는 프리미엄이 아니다: 품질 너머 '꿈'을 담다
먼저 책에서는 '럭셔리는 프리미엄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성능, 품질 등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가치를 통해 '더 나은' 제품임을 증명하려 한다면 럭셔리는 그 너머의 가치, '꿈'을 추구합니다. 기능적 완벽함보다는 브랜드 고유의 비전과 철학,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울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책에서는 '능가하는 것과 정체성을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outclassing a model is one thing, but possessing an identity is another)'라고 지적하며,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이라도 브랜드만의 '꿈'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진정한 럭셔리가 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럭셔리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 때도 있습니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결함'은 때로는 럭셔리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단한 중심: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의 축
'단단한 중심'이라는 제 오랜 화두도 떠올랐습니다. 럭셔리 브랜드가 외부의 시선이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비교를 거부하며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은, 바로 이 '단단한 중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단한 중심은 브랜드가 오랜 시간 지켜온 철학이자 비전이며, 모든 활동의 기준점이 됩니다. 결함을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이 단단한 중심의 힘이죠.
유행이나 시장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단단한 중심에서 나옵니다. 럭셔리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동시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전통에만 집착하면 시대에 뒤처져 고리타분해지기 쉽고, 반대로 동시대의 유행만을 좇다 보면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단한 중심'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브랜드는 단단한 중심을 축으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변화시킬지 판단합니다. 책에서는 브랜드 정체성의 '중심적인(central)' 측면과 '주변적인(peripheral)' 측면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변치 않아야 할 핵심(중심적인 측면)을 굳건히 지키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부분(주변적인 측면)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 비단 럭셔리 브랜드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사이트입니다.
2. 럭셔리의 기준: 시간 속에서 숙성된 가치
럭셔리가 비교급이 아닌 최상급인 두 번째 이유는 "스스로 설정한 아주 높은 수준의 기준"을 따른다는 점입니다. 럭셔리의 기준에는 '축적되고 계승되어 온 가치와 정신’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포함됩니다. 럭셔리 제품 하나하나에는 브랜드가 오랜 시간 쌓아온 역사와 고유한 문화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시간을 견디며 연마되고 숙성된 원칙이 그 기준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가 오랜 시간 쌓아온 시간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은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외부의 평가나 단기적인 유행에 휩쓸리기보다, 스스로 고민하며 충분히 숙성시킨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따라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저만의 '최상급' 기준을 만들어가는, 때로는 흔들리고 고민하며 그 기준을 숙성시켜 나가는 과정을 '담은 순간들'에 꾸준히 기록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3. 전통·유산·역사에 대한 존중: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깊이
럭셔리가 비교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마지막 이유는 "전통·유산·역사에 대한 깊은 존중"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럭셔리 브랜드에 있어 역사와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헤리티지와의 소통: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사 만들기
역사가 짧거나 없는 신생 브랜드는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갈까요? 책에서는 이들이 종종 역사적 서사를 '발명'하거나 '차용'하여 브랜드의 깊이를 더한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여기서 '차용'의 방식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저는 ‘헤리티지와 소통하는 삶’을 모토로 삼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며 신생 브랜드가 역사를 차용해서 브랜드의 깊이를 더해가듯 저 역시 헤리티지와 소통하며 저만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저의 맥락 속으로 가져와 새롭게 해석하고, '헤리티지의 맥락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저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갑니다. (신경미 작가가 본인의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을 보편적인 역사와 문화라는 더 넓은 시공간 속에 위치시키며 아픈 기억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작업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밑줄 클릭하시면 링크로 이어집니다.) 저 역시 때때로 찾아오는 깊은 외로움을, 유구한 헤리티지 속에 홀로 존재했던 수많은 섬세한 영혼들을 떠올리며 그 보편적인 맥락 속에 배치함으로써 위안을 얻곤 합니다.
아카이브의 힘: 브랜드의 정수를 담다
헤리티지를 존중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헤리티지를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아카이브의 중요성으로 이어집니다. 책에는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디렉터를 맡았을 때 샤넬 하우스의 아카이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샤넬만의 언어를 깊이 연구했다는 사례가 나옵니다. 아무리 뛰어난 디자이너라도 브랜드의 뿌리가 되는 역사와 정신을 존중하고 계승해야 진정한 창조가 가능합니다. 역사는 브랜드의 뿌리이며, 아카이브는 그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길어 올려 현재를 풍요롭게 하고 미래를 여는 통로입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저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사유하며 마음을 주었던 순간들을 이 공간 '담은 순간들'에 차곡차곡 기록하고 모으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책, 음악, 미술, 영화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발견들까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것들을 담아두려 합니다. 이렇게 쌓인 기록들이 훗날 저만의 소중한 헤리티지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든든한 뿌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맺음말
결국 "럭셔리는 최상급이지 비교급이 아니다"라는 말은, 럭셔리가 외부와의 비교·경쟁보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유한 정체성, 스스로 세우고 숙성시킨 높은 기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가치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브랜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 또한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해하기보다 자신만의 색깔과 기준으로 채워나가며 고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 더욱 풍요롭고 단단해지지 않을까요?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 안의 '최상급'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럭셔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럭셔리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은 순간들'에서는 앞으로도 럭셔리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꾸준히 담아갈 예정입니다. 당신이 추구하는 '최상급'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도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