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키아프에서 메간 멘지스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특유의 서정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그 작품을 마주했을 때, 계획에도 없던 소장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 한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어떤 단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 찰나의 순간
'코모레비'(木漏れ日、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 찰나의 순간.
책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에서 이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나만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는 반가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아름다운 순간을 명명할 수 있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설레임. 이후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그 감각을 영상으로 확인했을 때의 전율까지.
이제 그 코모레비가 캔버스에 담겨 마침내 제 공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발견하고 영화로 체감했던 그 아련하고 소중한 순간이, 이제는 제 곁에 실재하게 된 것입니다.
2. 빛과 빛이 포개질 때
집이 동향이라 아침 일찍부터 해가 깊숙이 들어옵니다. 캔버스에 담긴 빛 위로 실제 아침 햇살이 포개질 때면, 그림은 살아있는 풍경이 됩니다.
햇살 좋은 날 작품을 보고 집을 나서면 그 기운이 종일 저와 함께하는 듯합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그 빛의 잔상은 저를 지켜주는 은근한 힘이 됩니다. 이것이 컬렉팅이 주는 내밀한 기쁨일까요.
3. 나의 세계가 확장되던 순간
첫 컬렉팅 다음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아트 플랫폼 아트시(Artsy)의 기사 <5 Artists to Discover at Kiaf 2025>에 메간 멘지스가 소개되었는데, 기사에 실린 작품이 바로 제가 막 소장한 그 그림이었습니다.
단순한 우연 이상의 감동이었습니다. 저의 취향과 안목이 저만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듯한 기쁨, 그리고 감사함이었습니다.
4. 컬렉팅이 일깨워준 새로운 감각
첫 컬렉팅은 저에게 작품을 소장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선 감상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이전에는 막연히 '좋다', ‘내 취향은 아니다’고 느꼈던 것들이 이제는 '내 컬렉션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내 자아의 확장에는 어떤 역할을 할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감상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저만의 세계가 생겨났습니다. 홀로 집에 머무는 고요한 시간, 그림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는 그 자체로 깊은 명상이 됩니다. 아침의 햇살과 밤의 정적 속에서 작품과 교감하는 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롯한 저만의 세계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 작가들에게 이전보다 더 마음이 갑니다.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고, 어쩌면 우리가 함께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벅찬 포부도 품어봅니다.
자아의 확장을 꿈꾸게 합니다. 좁은 취향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나만의 컬렉션을 통해 그 지향점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싶습니다.
5. 컬렉션, 나의 나침반
컬렉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형태로 곁에 두는 일입니다. 그렇게 곁에 둔 작품은 제게 든든한 닻이 되어줍니다.
작품을 바라보며 삶의 지향점을 되새기고, 흔들릴 때면 다시금 중심을 잡습니다. 작품은 제 삶의 지향점을 비추는 거울이자, 길을 잃지 않게 돕는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지난 글 나의 감상에는 '나'가 있나요? ①이 '빌려온 시선'을 극복하기 위한 제 개인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고민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아 헤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압박감과 위축감. 이 불편하고도 익숙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로셸 거스타인(Rochelle Gurstein)의 책 ‘Written in Water’는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었는데요, 책장을 넘기며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을 알아보는 눈
18세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아름다움에 개인의 기호를 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술의 목표는 자연의 불완전함을 걸러낸 ‘이상적 미’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예술가는 고대 조각이나 라파엘로 같은 전범을 모방하고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가 권한 모방은 겉모습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거장들이 자연을 관찰하며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판단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인간 본성에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바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그 공통된 바탕에 닿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취미(taste)’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판단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와 같다면 널리 인정받는 작품 앞에서 감동하지 못했을 때, 아직 자신이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해석에 기대며 제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마음과 겹치는 대목입니다.
감상의 기준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배워야 할 모범은 언제나 옛 거장의 작품에 있을까요? 풍경화가 터너와 그의 옹호자 존 러스킨은 이미 인정받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 사례입니다. 터너의 폭풍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은 바다와 하늘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비난했습니다. 러스킨은 바로 그 혼란이 실제 폭풍 속 자연에 충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보라와 낮게 깔린 구름이 뒤섞이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러스킨은 이런 관찰을 근거로 터너를 옹호하며, 존경받던 옛 풍경화도 자연을 얼마나 충실히 표현했는지 다시 따졌습니다. 거장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그림이라 할 수 있는지, 그 판단의 근거를 다시 묻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느낌에 모든 판단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연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러스킨이 그림에 담긴 자연의 진실을 따졌다면, 월터 페이터는 감상자 자신의 반응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서 아름다운 육체뿐 아니라 쾌락의 여신에게 깃든 슬픔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살피려 했습니다.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앞서, 자신이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흔들리는 아카이브
저는 지난 글에서 ‘문화적 아카이브’와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남긴 작품과 해석을 살펴보며, 제 감상을 더 넓은 맥락에 놓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페이터가 보티첼리에서 새로운 가치를 읽어냈듯, 우리가 참고하려는 작품과 해석의 아카이브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메디치 비너스는 수 세기 동안 ‘이상적 미’의 모범으로 사랑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예전과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보티첼리는 후대의 눈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감상은 틀렸고 지금의 감상은 옳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작품을 사랑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저도 같은 감동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요. 다만 좋아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역사 속에서 나의 좌표 찾기
오래 사랑받아온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습니다. 배워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공감하고요. 다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감동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습니다.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묻기에 앞서, 제가 배우려는 기준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느낌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다른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로가 됩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제 안목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전시 공간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부딪히곤 했습니다. 하나는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솔직한 감정의 목소리입니다. “아름답다”, “불편하다”, “모르겠다”와 같은 반응들이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뭐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하고 묻는 목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후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직관은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반응일 뿐이며, 감상에는 지식과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가 느낀 것도 믿기 어려웠고, 어느새 예술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설레는 마음은 정말 나의 것일까?”
작품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좋은 작품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선은 정말 저의 것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감상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2023년 갤러리 휘슬에서 열린 전시 《근사치》 서문이 떠오릅니다. 박수지 큐레이터가 쓴 “우리가 수월하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술의 무엇을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기대어 있을 때 일어나는 서글픔”이라는 구절인데요.
비앙카 보스커의 『Get the Picture』(번역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을 이어갈 실마리를 주었습니다. 미술계 안으로 들어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제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빌려온 감상’이라는 함정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학력과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명문 미술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저명한 비평가의 호평, 높은 경매 낙찰가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기대를 만들곤 합니다.
그 기대에 제 감상을 맞추려 할 때가 문제였습니다. 작품 앞에서 느낀 솔직한 불편함이나 지루함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치부하고, 전시 서문과 비평가의 언어를 되짚으면서 정작 제 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는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 설명이 작품의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이미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 감상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보스커는 에린 오키프(Erin O’Keefe)의 사진을 판매하던 중 자신이 “맥락에 의견을 아웃소싱”했다고 돌아봅니다. 작품에 관해 설명할 말은 익혔는데, 정작 작품 자체를 충분히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제 감상인지 묻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봅니다.
작품의 배경과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을 눈앞의 작품과 연결하고, 제가 느낀 것과 견주어보는 과정에는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 나에게서 시작해 작품으로 돌아오기
저는 감상의 순서부터 바꿔보려 합니다. 제 반응을 먼저 살피고, 지식과 견주어본 뒤,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선 제 감각에 충분히 머물러보려 합니다. 작품 앞에서 생긴 끌림이나 반감에는 제가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기억도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해설을 찾아 읽기 전에, 눈앞의 작품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왜 하필 이 작품에 마음이 갈까?” “나의 어떤 경험과 기억이 이 형태에 반응하는 걸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라는 중요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 어떤 것에 익숙하고 무엇을 낯설어하는지가 지금의 감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관을 그저 미숙한 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처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그런 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지식을 꺼내 들어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가의 다른 작업,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을 찾아 읽습니다. 제가 혼자 보아서는 알기 어려웠던 배경, 그 시대에 그런 표현을 택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감상에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다고 해서, 살펴야 할 조건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스커가 앵그르의 미술사적 위치를 몰라도 되고,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낫다고 쓴 대목에서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작품 앞에서 직접 보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그 작품이 예술의 역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맥락을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미술사와 비평에는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질문하며 쌓아온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이 문화적 아카이브를 만나면, 처음의 감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몰랐던 역사와 논의를 접하며 판단을 고칠 수도 있고, 작품을 직접 들여다보며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직관과 지식이 서로를 시험하며 감상도 확장됩니다. 문화적 아카이브는 감상을 대신 결정해주는 정답지가 아니라, 제가 보지 못한 것도 이야기해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려놓고 작품 그 자체와 마주합니다. 배운 것으로 답을 확정하려는 마음을 잠시 놓아보는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감상을 맥락에 맡겼다고 깨달은 보스커도 오키프의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분홍색 바닥 위에는 노란 반원과 가느다란 갈색 막대,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한 형태가 놓여 있습니다. 입체물을 찍은 사진인데도 그림처럼 보여, 무엇이 실제 물체이고 무엇이 평면에 그려진 것인지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스커는 대학 시절 배웠던 사진의 성질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듯하지만, 무엇을 담고 잘라내는지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키프는 사진이 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는 듯했습니다. 계속 들여다보자 노란 배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작은 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려진 것일까, 빛이 반사된 것일까. 보스커는 이 불확실함 속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씁니다.
3. 선택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러가는 시선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작품을 함께 놓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시 게이즈’로 알려진 컬렉터 부부, 롭과 에릭의 이야기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보는 눈을 기릅니다. 롭은 미술사 책을 읽고 다른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눈여겨보며, 에릭은 직접 그림을 그려봅니다. 제러미 올슨의 그림 앞에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에릭은 작품에 강하게 끌렸지만, 롭은 누가 샀고 누가 관심을 보이는지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반응과 기사도 찾아본 뒤, 롭은 구매를 결정한 이유로 기존 컬렉션과의 어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을 보며 기뻐하는 에릭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작품이 자신들이 모아온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함께 살아갈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를 살핀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두 사람이 쌓아온 관심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깁니다.
그들이 컬렉션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롭은 자신들이 동성애자로서 느끼는 것을, 집에 온 이웃들도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작품을 통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온라인에 컬렉션을 공개하고 이웃에게 집을 열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고르고 어떻게 함께 보여줄지를 정하면서, 두 사람은 자기 컬렉션의 큐레이터가 됩니다. 작품을 선택할 때 담겼던 그들의 시선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이 됩니다. 수집과 큐레이팅은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며 확장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입니다.
나의 감상에 ‘나’가 있다는 것
작품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늘 일치하진 않습니다.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작품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작품 앞에 더 머물고 싶어지기도 하겠지요.
작품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와 제가 마음을 준 이유를 함께 살피며, 어느 부분에 공감하고 어디에서 생각이 달라졌는지 알아가고 싶습니다. 어떤 감상은 제 말로 풀어낼 수 있을 테고, 어떤 감상은 다시 찾아가 바라보는 동안 조금씩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품을 알아가는 동안, 감상하는 ‘나’도 함께 달라집니다.
2026년 9월,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다시 읽으며 단정적인 표현과 반복되는 설명을 다듬고, 책에서 읽은 것과 제 생각을 더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식과 제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스지잉(Shi Zhiying)의 그림은 그 고민을 다른 쪽에서 바라보게 했습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그 그림 앞에 오래 서서 감탄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닮아가고 싶었던 시선이라,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그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물체 하나와 그 곁의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아름답게 하는지 생각하다가, 둘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갔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읽은 전시 서문에는 고독한 돌 하나도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읽고 나니 그림 속 고독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품 앞에서는 연결하지 못했던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홀로 있어도, 관계 속에」에 썼습니다.
시작은 다른 사람의 감탄이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저는 그 그림을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따라 거듭 바라보고 서문을 찾아 읽는 동안, 제게도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제 안의 결핍이 성장의 원동력이라 믿어왔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는 끊임없이 저를 채찍질했고,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마음 줄 곳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한 편의 글이 그 단단했던 믿음에 균열을 냈습니다.
그 글은 척박한 땅일지라도, 그곳에서 치열하게 뿌리내려 마침내 꽃을 피워냈다면 그 땅은 더 이상 버려진 황무지가 아니라 소중한 정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장소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낸 충실한 시간이 그 장소를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핍’이라 굳게 믿었던 것이, 정말 결핍이었을까.
'결핍'이라는 프레임의 함정
처음에는 제가 '결핍이라 여겼던 것'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핍에서 비롯된 과도한 기대는 어김없이 서운함으로 이어졌고, 관계는 위태로워졌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찾은 곳이 예술과 운동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니 더는 상처받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핍을 채워야 한다’는 근본적인 동기가 바뀌지 않으니, 집착은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문제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결핍’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는 세상은, 사람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이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결핍에서 승화로
진정한 사랑은 ‘결핍을 메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호기심’에서 시작할 때 가능했습니다. 결과물의 성패를 따지기보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 미묘한 감각의 변화와 리듬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완벽함에 대한 기대를 버리자 비로소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대표적으로 운동이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을 키우고 싶다는,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목적이 앞섰습니다. 결과에 집착하니 목표 달성이 더딜 때면 자책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운동 그 자체가 주는 감각, 규칙적인 리듬이 주는 안정감,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작은 성취감 자체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에서 벗어나자, 운동은 비로소 제 삶의 온전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결핍이 승화되는 과정은 때로 한 개인을 넘어 인류의 서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와 결핍을 인류의 미래라는 거대한 사명으로 승화시킨 일론 머스크처럼 말입니다. (월터 아이작슨, 『일론 머스크』)
마음 둘 곳 없던 그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화성을 향한 그의 열정은 어쩌면 새로운 고향을 찾으려는 간절한 꿈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려는 사명감 역시, 세상에 없던 친족을 빚어내려는 외로운 소년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놀이터에서 홀로 상처받았던 소년의 기억이, 트위터라는 이름의 거대한 온라인 놀이터를 직접 소유하고 그곳의 규칙을 새로 쓰려는 어른의 비전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머스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결핍을 승화시킨 관점에서 보자면, 머스크의 사례는 과거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삼는 아름다운 형태의 승화로 다가옵니다.
나의 취향은 나의 눈물값
종종 누군가 저의 취향이 부럽다는 말을 건넬 때, 저는 속으로 ‘제 눈물값이에요’라고 되뇌곤 했습니다. 굳이 부러워할 것 없다는, 취향 필요 없으니 차라리 이 모든 아픔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자조 섞인 항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합니다. 상처가 아물며 더 단단한 살이 돋아나듯, 한때 결핍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것을요. 결핍은 메워야 할 구덩이가 아니라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갈 재료였습니다. 그 재료를 ‘결핍’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채로 바라볼 때는 고통이었지만, ‘나의 고유한 경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승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상처와 눈물은 이제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저만의 스타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보의 양이 질을 압도하는 시대, 인공지능(AI)이 생성하는 방대한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을까요? AI는 대개 최고의 자료보다는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를 우선시하며, 방대한 빅데이터를 학습시킨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그럴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루지 못한 채 피상적인 답변을 내놓곤 합니다. 그 '그럴듯함'은 때로 더 큰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안목은 단순히 많은 데이터를 접하는 것만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꾸준히 '양질의 것들'을 의식적으로 접하고, 깊이 있게 소화하는 과정을 통해 연마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안목'을 기르고,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AI와 빅데이터의 그럴듯함, 그 이면의 함정
인공지능은 기존의 널리 알려진 방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요약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활용하는 정보의 '질'까지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질의 자료보다는 온라인상에서 자주 논의되거나 쉽게 접근 가능한 자료를 우선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제되고 검증된 내용을 담고 있는 유료 구독이 필요하거나 특정 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고급 정보보다는, 대중적인 뉴스 기사나 블로그 게시물처럼 즉각적으로 확보 가능한 출처를 참고하는 것이죠. 이는 결과적으로 정보의 편향이나 피상적인 분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진정한 통찰과는 거리가 먼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빅데이터'에 대한 맹신 역시 경계해야 할 지점입니다.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질 높은 분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부동산 빅데이터를 투입하여 분석을 시도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결과물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의 복잡성과 미묘한 맥락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럴듯하게 포장된 내용이 더 큰 오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함마저 들었습니다. 그럴듯함에 속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진짜'를 알아보는 힘: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
그렇다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해야 그럴듯함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 시작은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대한 의식적인 노출(exposure)'에 있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접하는 것을 넘어,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만나느냐가 우리의 감각과 지성을 단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각이나 지성이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상시로 노출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자극을 줍니다. 그러나 자극은 다양할수록 좋겠지요. 독서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시, 답사, 강연에 참여하는 일, 그리고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퇴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양질의 자극 속에 자신을 놓아두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목은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꾸준히 양질의 자극을 통해 단련하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양질의 경험을 찾아 나서고 다양한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주체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알고리즘의 유혹: 보이지 않는 손에 흔들리는 선택
하지만 이렇게 의식적으로 다양한 양질의 자극에 자신을 노출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 알고리즘 때문입니다. SNS 피드, 쇼핑몰의 추천 상품,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알고리즘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알고리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고, 결과적으로 취향의 단순화·몰개성화·획일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한 기사는 이러한 '알고리즘 불안(Algorithmic Anxiety)' 현상을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을 갖기 전에 원하는 것을 예측하고 추천합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원하도록 교묘하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홍수 속 나만의 안식처: 양질의 큐레이션과 종이 잡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고리즘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양질의 정보를 선택하고, 소셜 미디어 피드 바깥에서 자신만의 취향을 탐구할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양질의 큐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데 있습니다.편집자의 깊이 있는 안목과 철학이 담긴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제공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자극과 깊이 있는 관점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양질의 큐레이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잡지', 특히 '종이 잡지'입니다.
종이 잡지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콘텐츠와 우연히 마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온라인 환경에서는 자신의 관심사를 벗어나는 정보를 만나기 어렵지만, 종이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주제나 이미지와 연이 닿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지금은 검색어조차 떠올리기 어려운 머나먼 과거의 콘텐츠나 분위기를 접하는 데에는 종이 잡지만큼 좋은 매체도 드뭅니다. 저 역시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을 때 종이 잡지를 많이 활용하곤 합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죽 훑어보다가 아이디어나 작업의 방향과 연결될 만한 이미지를 발견하면 스크랩하여 아이디어 보드를 만들곤 했는데요, 이러한 과정 자체가 알고리즘의 추천과는 다른 즐거움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시대의 거울, 문화의 기록: 한 시대를 대표한 잡지의 힘
종이 잡지가 지닌 이러한 발견의 즐거움과 자극은, 잡지가 한 시대의 문화와 지성을 깊이 있게 담아낸 '양질의 큐레이션'의 정수일 때 더욱 커집니다. 저는 2년 전 주말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 GQ 국내판을 정주행했는데요, '종이 잡지'를 주제로 다룬 잡지(어반라이크 34호)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GQ 초기판에 보낸 뜨거운 찬사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패션을 비롯, 문화 전반에 걸친 강렬한 콘텐츠로 대한민국 잡지 저널리즘의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을 기록했다”
"GQ 초기 에디션, 창간호부터 2~3년 정도를 좋아한다. 당시 GQ가 쏟아냈던 콘텐츠는 그야말로 폭격이었다. 당시 에디터들(이충걸, 문일완, 송원석, 정석헌, 장우철)이 썼던 기사는 지금 봐도 훌륭하다. 도발적인 아젠다를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같은 사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매체였다. 잡지가 뭘 해야 하는지, 잡지의 갈 길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그 시절의 GQ를 읽으며 이 코멘트들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잡지가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였던 2000년대 초반, GQ는 주제 선정·필진의 역량· 섭외력 등 모든 면에서 그야말로 끝판왕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잡지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 시대적 소명은 다했을지언정, 그 정신성은 여전히 영원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양질의큐레이션이 담긴 종이 매체를 통해, 평소 제 관심 분야가 아니었거나 온라인이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깊이 있는 콘텐츠들을 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추후 담은순간들에 과거 잡지에서 받은 영감도 다룰 예정입니다.)
오래된 미래: 낡은 잡지에서 발견하는 시간의 지혜
발행된 지 시간이 꽤 흐른 잡지에서는 현재의 일회성 리뷰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독특한 관점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최신 정보가 아니라는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시대의 고민과 지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이 너무나 큽니다.
10년도 더 된 '매거진 B' 에이솝 편(2013년 발행, 당시 브랜드명은 이솝이 아니라 '에이솝'이었습니다!)을 다시 펼쳐보며,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가 된 이솝의 초기 철학과 당시의 시대상을 느끼며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습니다. 또 5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모든 잡지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뿌리 깊은 나무'를 들춰보며 이 시대에 느끼기 힘든 정신성과 깊이에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잡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잘 보존된 '타임캡슐'로서, 현재의 획일화된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다채롭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창을 열어줍니다.
동시대를 보는 눈: 동시대 잡지의 역할과 가치
과거의 잡지들이 시간의 깊이를 통해 빛나는 통찰을 제공한다면, 동시대와 발맞추며 현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곁의 양질의 잡지들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과거의 지혜와 동시대의 흐름이 균형 있게 만날 때 비로소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있는 시각과 신뢰할 만한 정보를 꾸준히 제공하는 동시대의 잡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꾸준히 보아야 합니다. (저는 정밀한 팩트에 기반하여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국제 정세를 짚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비즈니스·문화·디자인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을 제시하는 '모노클(Monocle)'을 꾸준히 구독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안목 있는 편집자의 철학이 담긴 양질의 큐레이션을 꾸준히 접하는 습관은, 단편적인 정보의 파편을 넘어 세상을 읽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구축하고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만의 리듬 찾기: 디지털을 넘어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으로
의식적으로 양질의 잡지를 찾아 읽는 행위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 디지털 시대의 정보 소비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자연스럽게 '아날로그적 경험'의 가치로 이끌기도 합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잔카를로 발레(Giancarlo Valle)는 프로젝트에서 실제가 축소된 모형을 중요하게 활용하는데요, '모노클(Monocle)'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접근이 "인터넷 알고리즘에 대한 우리 스튜디오의 해독제"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었고 모두가 같은 것을 봅니다.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analogue algorithm)을 만들지 않는 한 그 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디지털 콘텐츠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은 의도적으로 다른 리듬과 질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줍니다. 목적 없이 산책하며 마음 가는 대로 향하기, 목적 없이 서점을 거닐며 우연히 발견한 책을 들춰보는 것, 하루 중 특정 시간만이라도 의도적으로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주변을 관찰하거나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날로그적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나 옥스포드 영어 사전 같은 전통적인 레퍼런스를 여전히 활용하는데요,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자료가 주는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정보에 즉시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깊이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컴퓨터 파일이 아닌 손으로 직접 노트에 정리하는 그녀의 오랜 습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처럼 그녀에게 물리적 실체가 있는 책과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디지털의 무한한 접근성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생산성과 사유의 깊이를 가져다주며,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정보를 체화하는 '아날로그적 알고리즘'의 좋은 예입니다.
우연한 발견과 '공예적 즐거움'
제니퍼 이건이 언급한 물리적 매체와의 깊이 있는 상호작용은, 종이 매체가 선사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의 신문이나 잡지에는 편집자의 고뇌와 안목이 담긴 야심 찬 기획이나 실력 있는 필자의 깊이 있는 칼럼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독자들은 설령 그 기사를 읽으려고 산 것이 아닐지라도, 이왕 샀으니 아까워서라도 한번은 읽게 되고, 예상외로 새로운 영감을 얻어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예상 밖의 콘텐츠 소비'는 종종 효율성과 '가성비'라는 잣대에 밀려 무용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우연한 만남과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과정 속에 창의성과 다채로운 사유가 싹트는 토양이 마련됩니다.
종이 매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짧은 생각을 메모하는 그 모든 아날로그적 행위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며, 여기에는 디지털이 제공하기 어려운 '공예적 즐거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선택하고, 관계 맺는 주체적인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스포티파이와 같은 플랫폼이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개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해도, 때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음에도 공허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예적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자신만의 손길과 노력을 거쳐 의미를 쌓아 올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과 연결되는 기쁨이야말로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넘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깊이 있는 경험이 아닐까요.
정보의 파도 속, 나를 지키는 주체적인 삶
우리는 정보의 양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알고리즘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 깊숙이 관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생각과 취향을 가꾸어 나가는 여정은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추천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때로는 불편함과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예상치 못한 만남을 즐기며, 자신만의 속도로 정보를 음미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능동적인 자세야말로 알고리즘과 AI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진정으로 충만한 생활을 누리는 길일 것입니다.